자포자기(自暴自棄)
절망 상태에 빠져서, 자신을 버리고 돌보지 않음.
전국시대를 살다간 아성(亞聖) 맹자(孟子)는 '자포(自暴)'와 '자기(自 棄)'에 대해《맹자(孟子)》'이루편(離婁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포(自暴)하는 사람과는 더불어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 자기(自棄)하는 사람과도 더불어 행동 을 할 수가 없다. 입만 열면
예의 도덕(禮義道德)을 헐뜯는 것을 '자포(自暴)'라고 한다. 한 편 도덕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인(仁)이나 의(義)라는 것은
자기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 각하는 것을 '자기(自棄)'라고 한다.
사람의 본성(本性)은 원래 선(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서 도덕의 근본 이념인 '인(仁)'은 편안한 집[安宅]과
같은 것이며, 올바른 길인 '의(義)'는 사람에게 있어서 정로(正路:正道)이다. 편안한 집을 비운 채 들어가 살려 하지 않으며 올
바른 길을 버린 채 그 길을 걸으려 하지 않는 것은 실로 개탄할 일이로다."
孟子曰 自暴者 不可與有言也 自棄者 不可與有爲也 言非禮義 謂之自暴 也 吾身不能居仁由義 謂之自棄也 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路也 曠安宅而弗居 舍正路而不由 哀哉.
전전긍긍(戰戰兢兢)
매우 두려워 벌벌 떨며 두려워함.
'전전(戰戰)'이란 몹시 두려워서 벌벌 떠는 모양이고, '긍긍(兢兢)'이 란 몸을 움추리고 조심하는 모양을 뜻한다.
이 말은 중국 최고(最古)의 시집(詩集)인《시경(詩經)》'소아편(小雅 篇)'의 '소민(小旻)'이라는 시(詩)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데 그 시의 내용은 모신(謀臣)이 군주의 측근에 있으면서 옛 법을 무시한 정치를 하고 있음을 개탄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감히 맨손으로 범을 잡지 못하고 [不敢暴虎]
감히 걸어서 강을 건너지 못한다 [不 敢憑河]
사람들은 그 하나는 알고 있지만 [人 知其一]
그밖의 것은 전혀 알지 못하네 [莫 知其他]
두려워서 벌벌 떨며 조심하기를 [戰 戰兢兢]
마치 깊은 연못에 임하듯 하고 [如 臨深淵]
살얼음을 밟고 가듯 해야 하네 [如 履薄氷]
또《논어(論語)》'태백편(太伯篇)'에 보면, 曾子가 병이 重해지자 제자 들을 불러서 말했다.
"내 발을 펴고, 내 손을 펴라.《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매우 두려운 듯이 조심하고, 깊은 연못에 임한 것 같이 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것 같이 하라.'고 했다. 지금 이후로는 나는 그것을 면(免)함을 알겠구나, 제자들아."
曾子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 詩云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 履薄氷 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
"동의어" 전전긍긍(戰戰兢兢)
"유사어" 소심익익(小心翼翼)
전전반측(輾轉反側)
누워서 이리저리 뒤척거리며 잠을 못 이룸.
고민으로 인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 혹은 잠자지 못하고 뒤척임 을 되풀이 하는 것을 형용하여 '輾轉反側'이라고
하거니와, 이 말은 본래는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워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형용해서 하는 말이다.
"詩經"'周南'의 관저(關雎)에 이렇게 실려 있다.
구룩구룩 물수리는 강가 섬에 있도다.
아리따운 아가씨는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
들쭉날쭉한 마름풀을 좌우로 헤치며 따는도다.
아리따운 아가씨를 자나깨나 구하는도다.
구하여도 얻지 못하니 자나깨나 생각하는도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지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도다.
關關雎鳩 在河之州
窈窕淑女 君子好逑
參差荇菜 左右流之
窈窕淑女 寤寐求之
求之不得 寤寐思服
悠哉悠哉 輾轉反側
이 제2절의 결구가 '輾轉反側'이다. 이 노래는 물쑥을 따면서 부르는 연가(戀歌)이다. 즉 노동가(勞動歌)임과 동시에
연애가(戀愛歌)이기도 하다.
전차복철(前車覆轍)
앞 수레가 엎어진 바퀴 자국이란 뜻. 곧 ① 앞사람의 실패. 실패의 전례. ② 앞사람의 실패를 거울삼아 주의하라는 교훈.
① 전한 5대 황제인 문제(文帝)때 가의(賈誼:B.C. 168∼210)라는 명신 이 있었다. 그는 문제가 여러 제도를 개혁하고 어진
정치를 베풀어 역사에 인군(仁君)으로 이름을 남기는 데 크게 기여한 공신인데, 당시 그가 상주한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속담에 '앞 수레의 엎어진 바퀴 자국[前車覆轍]'은 뒷수레를 위한 교 훈[後車之戒]이란 말이 있사옵니다. 전 왕조인
진(秦)나라가 일찍 멸망한 까닭은 잘 알려진 일이 온데, 만약 진나라가 범한 과오를 피하지 않는다면 그 전철(前轍)을 밟게
될 뿐이옵니 다. 국가 존망, 치란(治亂)의 열쇠가 실로 여기에 있사오니 통촉하시오소서."
문제는 이후 국정 쇄신(國政刷新)에 힘써 마침내 태평 성대를 이룩했 다고 한다.
② 이 말은 "설원(說苑)"〈선설(善說)〉에도 실려 있다.
전국 시대, 위(魏)나라 문후(文侯)가 어느 날 중신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었다. 취흥(醉興)이 도도한 문후가 말했다.
"술맛을 보지 않고 그냥 마시는 사람에게는 벌주를 한 잔 안기는 것 이 어떻겠소?"
모두들 찬동했다. 그런데 문후가 맨 먼저 그 규약을 어겼다. 그러자 주연을 주관하는 관리인 공손불인(公孫不仁)이 술을
가득 채운 큰잔을 문후에게 바쳤다. 문 후가 계속 그 잔을 받지 않자 공손불인은 이렇게 말했다.
"전차 복철은 후차지계'란 속담이 있사온데, 이는 전례를 거울삼아 주 의하라는 교훈이옵니다. 지금 전하께서 규약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 규약을 지키지 않는 전 례를 남기신다면 누가 그 규약을 지키려 하겠나이까? 하오니, 이 잔을 받으시오소서."
문후는 곧 수긍하고 그 잔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그 후 공손불인을 중용했다고 한다.
전화위복(轉禍爲福)
① 화(禍)를 바꾸어 오히려 복(福)이 되게 함. ② 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됨.
전국시대 합종책(合從策)으로 6국, 곧 한(韓), 위(魏), 조(趙), 연(燕), 제(齊), 초(楚)의 재상을 겸임했던 종횡가(縱橫家:모사)
소진(蘇秦)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옛날에 일을 잘 처리했던 사람은 '화를 바꾸어 복을 만들었고[轉禍爲 福]' 실패한 것을 바꾸어 공(功)으로
만들었다[因敗爲功]."
어떤 불행한 일이라도 끊임없는 노력과 강인한 의지로 힘쓰면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말이다.
"주" 소진 : 전국 시대 말엽의 종횡가. 주(周)나라의 도읍 낙양[洛陽: 산서성(山西省) 내] 사람. 근처의 귀곡(鬼谷)에 은거하던
수수께끼의 종횡가 귀곡 선생[鬼谷 先生:제반 지식에 통달한 인물로서 종횡설을 논한 "귀곡자(鬼谷子)" 3권을 지었다고
함]에게 배웠음. 따라서 소진이 죽은 뒤 연횡책(連橫策)을 펴 합종책을 깨뜨린 장의(張儀:?∼B.C. 309)와는 동문이 되는 셈.
제(齊)나라에서 살해됨.(?∼B.C. 317).
절차탁마(切磋琢磨)
옥, 돌, 상아 따위를 자르고 쪼고 갈고 닦아서 빛낸다는 뜻으로, '학문, 덕행을 갈고 닦음'의 비유
"論語" '學而篇'에는 "詩經"에 실려 있는 시가 인용되고 있다.
자공(子貢)이 孔子께 여쭈었다.
"가난해도 아첨함이 없고, 부유하면서 교만함이 없는 것은 어떠합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도다. 그러나 가난해도 도(道)를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 도 예절을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느니라." 자공(子貢)이
다시 여쭈었다.
"시경에 이르기를, 끊는 듯이 하고, 닦는 듯이 하며, 쪼는 듯이 하고, 가는 듯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것을
이릅입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사(賜)야, 비로소 더불어 시를 논할 만하구나. 지난 일들을 일 러 주었더니 닥쳐올 일까지 아는구나."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 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 者.
"원 말" 여절여차 여탁여마(如切如磋 如琢如磨)
"준 말" 절마(切磨)
정중지와(井中之蛙)
우물 안 개구리, 즉 견문이 좁아서 넓은 세상의 사정을 모름의 비유.
황하의 신(神)인 하백(河伯)이 흐름을 따라 처음으로 바다에 나와, 북 해(北海)까지 가서 동해(東海)를 바라보면서, 그 끝이
없는 넓음에 놀라서 북해의 신(神)인 약(若)에게 말했다. 그러자 북해의 신(神)인 약(若)이 이렇게 말했다.
"우물 안에서 살고 있는 개구리에게 바다를 얘기해도 알지 못하 는 것은, 그들이 좁은 장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며, 여름
벌레에게 얼음을 말해도 알지 못 하는 것은, 그들이 여 름만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식견(識見)이 좁은 사람에게는 도
(道)를 말해도 알지 못하거니와, 그것은 그들이 상식의 가르침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 좁은
개울에서 나와 큰 바다를 바라보고, 자기의 추(醜)함을 알았기 때 문에 이제 더불어 큰 진리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北海若曰 井?不可以語海者 拘於處也 夏蟲不可以語於氷者 篤於時也 曲土不可以語於道者 束於敎也 今爾出於崖?
觀於大海 乃知爾醜 爾將可與語大理矣.
이것은 "莊子" '秋水篇'에 실려 있는 첫머리의 에피소드로, 하백(河伯) 과 북해의 신(神)인 약(若)과의 문답은 계속된다.
이 문답을 통하여 莊子는 道의 높고 큼과 대소귀천(大小貴賤)은 정하 여진 것이 아니니, 대소귀천(大小貴賤)의 구별을
잊고서 道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井中之蛙 不知大海'는 '우물 가운데 있는 개구리는 바다를 말해도 알 지 못한다'라는 뜻으로 중국에서는 '井蛙'라고 말하며
또 '井底蛙'라고 말하기도 한 다.
"원 말" 정중와 부지대해(井中之蛙 不知大海)
"준 말" 정와(井蛙)
"동의어" 정와(井蛙), 정중와(井中蛙), 정저와(井底蛙), 감정지와(堪井 之蛙)
"유사어" 촉견폐일(蜀犬吠日), 월견폐설(越犬吠雪)
조강지처(糟糠之妻)
술재강과 겨로 끼니를 이을 만큼 구차할 때 함께 고생하던 아내.
전한(前漢)을 찬탈한 왕망(王莽)을 멸하고 유씨(劉氏) 천하를 재흥한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일이다. 건원(建元)
2년(26), 당시 감찰(監察)을 맡아보던 대 사공(大司空:御史大夫) 송홍(宋弘)은 온후한 사람이었으나 간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기도 했다.
어느 날, 광무제는 미망인이 된 누나인 호양공주(湖陽公主)를 불러 신 하 중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그 의중을 떠보았다.
그 결과 호양 공주는 당당한 풍채와 덕성을 지닌 송홍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광무제는 호양공주를
병풍 뒤에 앉혀 놓고 송홍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이런 질문을 했다.
"흔히들 고귀해지면 (천할 때의) 친구를 바꾸고, 부유해지면 (가난할 때의) 아내를 버린다고 하던데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니겠소?"
그러자 송홍은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 황공하오나 신은 '가난하고 천할 때의 친구는 잊지 말아야 하며[貧賤之交 不可忘], 술재강과 겨로 끼니를 이을 만큼
구차할 때 함께 고생하던 아내는 버리지 말아야 한다[糟糠之妻 不下堂]'고 들었사온데 이것은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되나이
다."
이 말을 들은 광무제와 호양 공주는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조명시리(朝名市利)
명성은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은 저자[市場]에서 다투라는 뜻으로, 무슨 일 이든 적당한 장소에서 행하라는 말.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 때(B.C. 317)의 일이다. 중신 사마조(司馬 錯)는 어전에서 '촉(蜀)의 오랑캐를 정벌하면 국토도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물도 쌓일 것이므로, 이야말로 일거양득(一擧兩得)'이라며 촉으로의 출병을 주장했다.
그러나 종횡가(縱橫家) 출신의 재상 장의(張儀)는 그와는 달리 혜문왕 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진나라는 우선 위(魏), 초(楚) 두 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한(韓)나 라의 삼천(三川) 지방으로 출병한 후 천하의 종실인
주(周)나라의 외곽을 위협하면, 주나라 는 스스로 구정[九鼎:천자(天子)를 상징하는 보물]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그 보물을 내놓을 것이옵니다. 그때 천자를 끼고 천하에 호령하면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나 이까? 이것이
패업이라는 것이옵니다. 그까짓 변경의 촉을 정벌해 봤자 군사와 백성을 피폐 (疲弊)케 할 뿐 무슨 명리(名利)가
있겠나이까?
신(臣)이 듣기로는 '명성은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은 저자에서 다툰다[朝名 市利]'고 하옵니다. 지금 삼천 지방은 천하의
저자이옵고 주나라 황실(皇室)은 천하의 조정 이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이것을 다투려 하지 않고 하찮은 오랑캐의
촉을 다투려 하 시옵니다. 혹, 패업을 멀리하시려는 것은 아니옵나이까?"
그러나 혜문왕은 사마조의 진언에 따라 촉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국토 를 넓히는 데 주력했다.
"주" 장의 : 전국 시대 말엽의 종횡가. 위(魏)나라 사람. 합종책(合縱 策)으로 6국의 재상을 겸임했던 소진(蘇秦)과 함께
수수께끼의 종횡가인 귀곡 선생(鬼谷先 生)에게 종횡의 술책을 배움. 위나라의 재상으로 있다가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신임 을 받아 진나라의 재상이 됨. 소진이 제(齊)나라에서 살해되자(B.C. 317) 6국을 순방, 유세 (遊說)하여
소진의 합종책을 깨고 연횡책(連◈策)을 성사시켜 6국으로 하여금 개별적으로 진나라를 섬기게 함. 혜문왕이 죽은 후
참소(讒訴)를 당하여 위나라에서 객사(客死)함. (?∼ B.C. 309).
조삼모사(朝三暮四)
간사한 꾀로 남을 속여 희롱함을 이르는 말.
송(宋)나라에 저공(狙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저(狙)'란 원숭이를 뜻한다. 그 이름이 말해 주듯이 저공은 많은 원숭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는 가족의 양식까 지 퍼다 먹일 정도로 원숭이를 좋아했다. 그래서 원숭이들은 저공을 따랐고 마음까지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워낙 많은 원숭이를 기르다 보니 먹이를 대는 일이 날로 어려 워졌다. 그래서 저공은 원숭이에게 나누어 줄 먹이를
줄이기로 했다. 그러나 먹이를 줄이면 원숭이들이 자기를 싫어할 것 같아 그는 우선 원숭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나누어 주는 도토리를 앞으로는 '아침에 세 개, 저 녁에 네 개(朝三暮四)'씩 줄 생각인데 어떠냐?"
그러자 원숭이들은 한결같이 화를 내었다. '아침에 도토리 세 개로는 배가 고프다'는 불만임을 안 저공은 '됐다' 싶어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朝四暮三)'씩 주 마."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했다고 한다.
宋有狙公者 愛狙養之成群 能解狙之意 狙亦得心之心 損其家口 充 狙之欲 俄而?焉 將限其食 恐重狙之不訓於己也
先?之曰 與若?朝三而 暮四 足乎 衆狙皆起而怒 俄而曰 與若? 朝四而暮三 足乎 衆狙皆伏而喜.
"준 말" 조삼(朝三)
"동의어" 조사모삼(朝四暮三)
좌단(左袒)
웃옷의 왼쪽 어깨를 벗는다는 뜻으로, 남에게 편들어 동의함을 이르는 말.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황후인 여태후(呂太后)가 죽자 (B.C. 180) 이제까지 그녀의 위세에 눌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던 유씨(劉氏) 일족과 진 평(陳平)?주발(周勃) 등 고조의 유신(遺臣)들은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북군(北軍)을
장악한 조왕(趙王) 여록(呂祿), 남군(南軍)을 장악한 여왕(呂王) 여산(呂産)을 비롯한 외척 여씨(呂氏) 타도에 나섰다.
그간 주색에 빠진 양 가장했던 우승상(右丞相) 진평은 태위(太尉) 주 발과 상의하여 우선 여록으로부터 상장군의
인수(印綬)를 회수하기로 했다. 마침 어린 황제 를 보필하는 역기가 여록과 친한 사이임을 안 진평은 그를 여록에게 보냈다.
역기는 여록을 찾아가 황제의 뜻이라 속이고 상장군의 인수를 회수해 왔다. 그러자 주발은 즉시 북군의 병 사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원래 한실(漢室)의 주인은 유씨이다. 그런데 무엄하게도 여씨가 유씨 를 누르고 실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이는 한실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나 상장군 주발 은 천하를 바로잡으려고 한다. 여기서 여씨에게 충성하려는 자는
우단(右袒)하고, 나와 함께 유씨에게 충성하려는 자는 좌단(左袒)하라."
그러자 전군(全軍)은 모두 좌단하고 유씨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이리하여 천하는 다시 유씨에게로 돌아갔다.
주지육림(酒池肉林)
술로 못을 이루고, 고기로 숲을 이룬다는 뜻으로, '극히 호사스럽고 방탕한 술잔치'를 이르는 말.
고대 중국의 夏나라 걸왕(桀王)과 殷나라 주왕(紂王)은 원래 지용(智 勇)을 겸비한 현주(賢主)였으나 그들은 각기
말희(?姬)와 달기(?己)라는 희대 (稀代)의 두 요녀 독부(妖女毒婦)에게 빠져서 사치(奢侈)와 주색(酒色)에 탐닉(眈溺)하다가
결국 폭군 음주(暴君淫主)라는 낙인(烙印)이 찍힌 채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夏나라 걸왕은 자신이 정복한 오랑캐의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공물 (供物)로 바친 희대의 요녀 말희에게 반해서 보석과
상아로 장식한 궁전을 짓고 옥으로 만 든 침대에서 밤마다 일락(逸樂)을 베풀기로 했다.
또 무악(舞樂)에 싫증이 난 말희의 요구에 따라 궁정(宮庭) 한 모퉁이 에 큰 못을 판 다음 바닥에 새하얀 모래를 깔고
향기로운 미주(美酒)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못 둘레에는 고기[肉]로 동산을 쌓고 포육(脯肉)으로 숲을 만들었다. 걸왕과
말희는 그 못에 호화선을 띄우고, 못 둘레에서 춤을 추던 3,000명의 미소녀(美少女)들이 신호의 북이 울리면 일제히 못의
미주를 마시고 숲의 포육을 탐식(貪食)하는 광경을 구경하며 희희낙낙 즐겼다. 그러니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의 원성은 하늘에 닿았다. 이리하여 걸왕은 하나라에 복속(服屬)했던 殷나라 탕왕에게 주벌(誅伐)
당하고 말았다.
또한 탕왕으로부터 28대째로 殷나라 마지막 군주가 된 주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기는 주왕이 정벌한 오랑캐의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공물(供物)로 보내온 희 대의 독부였다. 주왕은 그녀의 끝없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았 다. 그래서 창고에는 백성들로부터 수탈(收奪)한 전백(錢帛)과 곡식이 산처럼 쌓였고, 국내 의
온갖 진수기물(珍獸奇物)은 속속 궁중으로 징발되었다. 또 국력을 기울여 호화찬란한 궁 정을 짓고 미주와 포육으로
'酒池肉林'을 만들었다. 이렇듯 폭군 음주(暴君淫主)로 악명을 떨치던 주왕도 결국 걸왕의 전철을 밟아 周나라 시조(始祖)인
무왕(武王)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동의어" 육산주지(肉山酒池)
"유사어" 육산포림(肉山脯林)
죽마고우(竹馬故友)
① 어렸을 때의 벗.(소꼽동무), ② 어렸을 때 친하게 사귄 사이, ③ 어렸을 때부터 오랜 친구.
진(晉 : 東晉)나라 12대 황제인 간문제(簡文帝 : 371-372) 때의 일이다.
촉(蜀) 땅을 평정하고 돌아온 환온(桓溫)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간문 제는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은호(殷浩)라는
은사(隱士)를 건무장군(建武將軍) 양주자사(楊州 刺史)에 임명했다. 그는 환온의 어릴 때 친구로서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인재였다. 은호가 벼슬길에 나아가는 그날부터 두 사람은 정적(政敵)이 되어 반목(反目)했다. 왕희지(王羲之) 가
화해시키려고 했으나 은호가 듣지 않았다.
그 무렵, 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 중 하나인 후조(後趙)의 왕 석계룡 (石季龍)이 죽고 호족(胡族)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진나라에서는 이 기회에 중원 땅을 회 복하기 위해 은호를 중원장군에 임명했다. 은호는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으나 도중에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결국 대패하고 돌아왔다. 환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호를 규탄하는
상소(上疏)를 올려 그를 변방으로 귀양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환온은 사람 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호는 나와 '어릴 때 같이 죽마를 타고 놀던 친구[竹馬故友]' 였지만 내가 죽마를 버리면 은호가 늘 가져가곤 했지. 그러니
그가 내 밑에서 머리를 숙여 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환온이 끝까지 용서해 주지 않음으로 해서 은호는 결국 변방의 귀양 지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동의어" 죽마지우(竹馬之友), 죽마구우(竹馬舊友)
"유사어" 기죽지우(騎竹之友), 죽마지호(竹馬之好)
준조절충(樽俎折衝)
'술자리[樽俎(間)]에서 유연한 담소(談笑)로 적의 창끝을 꺾어 막는다[折 衝]는 뜻으로, 외교를 비롯하여 그 밖의 교섭에서 유리하게 담판하거나 흥정함을 이르는 말.
춘추 시대, 제(齊)나라 장공(莊公)이 신하인 최저에게 시해되자 동생 이 뒤를 잇고 경공(景公)이라 일컬었다. 경공은 최저를
좌상(左相)에 임명하고 그를 반대하 는 자는 죽이기로 맹세까지 했다. 이어 모든 신하가 맹세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안영만은 맹세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 했다고 한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라면 좋으련만.'
이윽고 최저가 살해되자 경공은 안영을 상국(相國)에 임명했다. 안영 은 온후박식(溫厚博識)한 인물로서 '한 벌의 호구(여우
겨드랑이의 흰 털가죽으로 만든 갖 옷)를 30년이나 입었을'정도로 검소한 청백리이기도 했다. 한 번은 경공이 큰
식읍(食邑)을 하사하려 하자 그는 이렇게 말하며 사양했다고 한다.
"욕심이 충족되면 망할 날이 가까워지나이다."
당시 중국에는 대국만 해도 12개국이나 있었고 소국까지 세면 100개 국이 넘었다. 안영은 이들 나라를 상대로 빈틈없이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제나라의 지위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안영의 외교 수완에 대해 그의 언행을 수록한《안자 춘추(晏子春秋)》는 이렇게 쓰고 있다.
"술통과 도마 사이[樽俎間:술자리]를 나가지 아니하고 1000리(里) 밖에서 절충한다 함은, 그것은 안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주" 준조 사이 : '술통과 도마 사이'란 뜻으로, 술자리(연회석)를 가리키는 말.
중과부적(衆寡不敵)
적은 수효가 많은 수효를 대적하지 못한다는 뜻.
전국 시대, 제국을 순방하며 왕도론(王道論)을 역설하던 맹자가 제 (齊)나라 선왕(宣王)에게 말했다.
"전하 스스로는 방일(放逸)한 생활을 하시면서 나라를 강하게 만들고 천하의 패권(覇權)을 잡으려 드시는 것은 그야말로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緣木 求魚]'과 같사옵니다."
"아니, 과인의 행동이 그토록 나쁘단 말이오?"
"가령, 지금 소국인 추(鄒)나라와 대국인 초(楚)나라가 싸운다면 어느 쪽이 이기겠나이까?"
"그야, 물론 초나라가 이길 것이오."
"그렇다면 소국은 결코 대국을 이길 수 없고 '소수는 다수를 대적하 지 못하며[衆寡不敵]' 약자는 강자에게 패하기
마련이옵니다. 지금 천하에는 1000리(里) 사 방(四方)의 나라가 아홉 개 있사온데 제나라도 그중 하나이옵니다. 한 나라가
여덟 나라를 굴복시키려 하는 것은 결코 소국인 초나라가 대국인 초나라를 이기려 하는 것과 같지 않사 옵니까?"
이렇게 몰아세운 다음 맹자는 예의 왕도론을 설파했다.
"왕도로써 백성을 열복(悅服)시킨다면 그들은 모두 전하의 덕에 기꺼 이 굴복할 것이오며 또한 천하는 전하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옵니다…‥.'
중석몰촉(中石沒鏃)
쏜 화살이 돌에 깊이 박혔다는 뜻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전력을 다하 면 어떤 일에도 성공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
① 전한(前漢)의 이광(李廣)은 영맹한 흉노족의 땅에 인접한 농서[감 숙성(甘肅省)] 지방의 무장 대가(武將大家) 출신으로,
특히 궁술(弓術)과 기마술이 뛰어난 용 장이었다. 문제(文帝) 14년(B.C. 166), 이광은 숙관(肅關)을 침범한 흉노를 크게
무찌를 공으 로 시종 무관이 되었다. 또 그는 황제를 호위하여 사냥을 나갔다가 혼자서 큰 호랑이를 때 려잡아 천하에
용명(勇名)을 떨치기도 했다. 그 후 이광은 숙원이었던 수비 대장으로 전임되 자 변경의 성새(城塞)를 전전하면서 흉노를
토벌했는데 그때도 늘 이겨 상승(常勝) 장군으 로 통했다. 그래서 흉노는 그를 '한나라의 비장군(飛將軍)'이라 부르며 감히
성해를 넘보지 못했다.
어느 날, 그는 황혼 녘에 초원을 지나다가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를 발견하고 일발필살(一發必殺)의
신념으로 활을 당겼다. 화살은 명중했다. 그 런데 호랑이가 꼼짝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화살이 깊이 박혀 있는
큰돌이었다. 그는 제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쏘았으나 화살은 돌에 명중하는 순간 튀어 올랐다. 정신을 한 데 모으지 않았기
때문이다.
②《한시외전(韓詩外專)》에도 초(楚)나라의 웅거자(熊渠子)란 사람이 역시 호랑이인 줄 알고 쏜 화살이 화살 깃까지 묻힐
정도로 돌에 깊이 박혔다[射石飮羽]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중원축록(中原逐鹿)
중원[天下]의 사슴[帝位]을 쫓는다는 뜻. 곧 ① 제위(帝位)를 다툼. ② 정권 을 다툼. ③ 어떤 지위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함.
한(漢)나라 고조(高祖) 11년(B.C. 196), 조(趙)나라 재상이었던 진희가 대(代:산서성)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는 군사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그 틈에 진희 와 내통하고 있던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이 도읍 장안(長安)에서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 나 사전에 누설되어 여후(呂后:고조의 황후)와 재상 소하(蕭何)에게 모살 당하고 말았다. 이윽고 난을 평정하고 돌아온
고조는 여후에게 물었다.
"한신이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하지 않았소?"
"괴통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분하다고 하더이다."
괴통은 제(齊)나라의 언변가로서 고조 유방이 항우와 천하를 다투고 있을 때 제왕(齊王)이었던 한신에게 독립을 권했던
사람이다. 그 후 고조 앞에 끌려 나온 괴 통은 조금도 겁내는 기색 없이 당당히 말했다.
"그때 한신이 신의 말을 들었더라면 오늘날 폐하의 힘으로도 어쩌지 못했을 것이옵니다."
고조는 크게 노했다.
"저놈을 당장 삶아 죽여라!"
그러자 괴통은 이렇게 항변했다.
"폐하, 신은 전혀 삶겨 죽을 만한 죄를 진 적이 없나이다. 진(秦)나라 의 기강이 무너지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각지에 영웅
호걸들이 일어 났사옵고, 진나라가 사슴[鹿:帝位]을 잃음으로 해서 천하는 모두 이것을 쫓았던[逐] 것이오며, 그중 키 크고
발빠 른 걸물(傑物:고조 유방을 가리킴)이 이것을 잡았던 것이옵니다. 그 옛날 대악당인 '도척의 개가 요(堯) 임금을 보고
짖었다'고 해서 요 임금이 악인이라 짖은 것은 아니옵니다. 개란 원래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온데 당시 신은 오직 한신만
알고 폐하를 몰랐기 때문에 짖었 던 것이옵니다. 그런데 천하가 평정된 지금 난세에 폐하와 마찬가지로 천하를 노렸다 해서
삶아 죽이려 하신다면 이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통촉하시옵기를…‥."
빈틈없는 항변에 할 말을 잃은 고조는 괴통을 그냥 놓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주" 요 : 중국 고대의 이상적 성군(聖君).
도척 : 춘추 시대, 성인(聖人) 공자(孔子)와 같은 시대를 살다 간 같은 노(魯)나라 사람으로 큰 도둑. 도당 9000여 명과 늘
전국을 휩쓸며 같은 악행(惡行)을 일삼 음으로 해서 대악당(大惡黨)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함.
지록위마(指鹿爲馬)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하는 것을 가리킴.
秦나라 시황제가 죽자 측근 환관인 조고(趙高)는 거짓 조서(詔書)를 꾸며 태자 부소(扶蘇)를 죽이고 어린 호해(胡亥)를 세워 2세 황제로 삼았다. 현명한 부 소보다 용렬한 호해가 다구기 쉬웠기 때문이다. 호해는
'천하의 모든 쾌락을 마음껏 즐기며 살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한다.
어쨌든 조고는 이 어리석은 호해를 교묘히 조종하여 경쟁자인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 그밖에 많은 구신(舊臣)들을 죽이고
스스로 승상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역심이 생긴 조고는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 호해에게 사슴을 바치며 이렇게 말했다.
"폐하, 말[馬]을 바치오니 거두어 주시옵소서."
"승상은 농담도 잘 하시오. '사슴을 가지고 말이라고 하다니[指 鹿爲馬]'……. 어떻소? 그대들 눈에도 말로 보이오?"
말을 마치자 호해는 웃으며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잠자코 있 는 사람보다 '그렇다'고 긍정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고는 부정한 사람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趙高欲慰亂 恐群臣不聽 乃先設驗 持鹿獻於二世曰 馬也 二世笑曰 丞相誤邪 謂鹿爲馬. 問左右 左右或默 或言馬
以阿順趙高 或言鹿者 高因陰中諸言鹿者以法 後 群臣皆畏高.
그러나 천하는 오히려 혼란에 빠졌다. 각처에서 진나라 타도(打倒)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중 항우와 유방의
군사가 도읍 함양(咸陽)을 향해 진격해 오 자 조고는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子?)을 세워 3세 황제로 삼았다.(BC
207) 그러나 이번에는 조고 자신이 자영에게 주살 당하고 말았다.
지어지앙(池魚之殃)
연못 속 물고기의 재앙이란 뜻. 곧 ① 화(禍)가 엉뚱한 곳에 미침. ② 상관 없는 일의 재난에 휩쓸려 듦의 비유. 언걸 먹음.
춘추 시대 송(宋)나라에 있었던 일이다. 사마(司馬:大臣) 벼슬에 있는 환퇴라는 사람이 천하에 진귀한 보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죄를 지어 처벌을 받게 되자 보석을 가지고 종적을 감춰 버렸다. 그러자 환퇴의 보석 이야기를 듣고 탐이 난
왕은 어떻게든 그 보석을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은 측근 환관에게 속히 환퇴를 찾아내어 보석을 감춰 둔 장 소를 알아보라고 명했다. 환관이 어렵사리 찾아가자
환퇴는 서슴없이 말했다.
"아, 그 보석 말인가? 그건 내가 도망칠 때 궁궐 앞 연못 속에 던져 버렸네."
환관이 그대로 보고하자 왕은 당장 신하에게 그물로 연못 바닥을 훑 어보라고 명했다. 그러나 보석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연못의 물을 다 쳐낸 다음 바닥을 샅샅이 뒤졌으나 보석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연못의 물을 퍼 없애는 바람에
결국 애꿎은 물고기들만 다 말라죽고 말았다.
징갱취제(懲>羹吹제)
뜨거운 국에 데어서 냉채를 후후 불고 먹는다는 뜻으로, 한 번 실패 한 데 데어서 모든 일에 지나치게 조심함의 비유.
전국 시대 말엽, 진(秦)나라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초(楚), 제(齊) 두 나라뿐이었다. 그래서 진나라 재상 장의(張儀)는 초,
제 동맹의 강화론자(强化論者)인 초 나라의 삼려 대부[三閭大夫:소(昭), 굴(屈), 경(景) 세 왕족의 족장(族長)]
굴원[屈原:이름은 평(平), B.C. 343?∼277?]을 제거하기로 작정하고 기회를 노렸다. 이윽고 초나라 회왕(懷王) 의 총회(寵姬)
정수(鄭袖)와 영신, 근상(勤尙) 등이 굴원을 증오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 다. 장의는 곧 그들을 매수하여 굴원의 실각
공작을 폈다. 드디어 굴원이 조정으로부터 축출 되자 장의는 회왕에게 제나라와 단교하면 진나라의 국토 600리를
할양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래서 회왕은 제나라와 단교했으나 장의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속았다는 것을 안 회 왕은
분을 참지 못해 진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대패하고 도리어 접경 지역의 국토까지 빼앗겼다. 회왕은 지난 일을 후회하고
굴원을 다시 등용했다.
그 후 10년이 지난(B.C.299) 어느 날 진나라로부터 우호 증진이란 미 명 아래 회왕을 초청하는 사신이 왔다. 굴원은 믿을 수
없는 진나라의 초청에 응해서는 안 된다며 극구 방대했다. 그러나 회왕은 왕자 자란(子蘭)의 강권에 따라 진나라에 갔다가
포로 가 되어 그 이듬해 객사하고 말았다.
초나라에서는 태자가 왕위에 오르고 동생인 자란이 재상이 되었다. 굴원은 회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란에게 책임을
물었으나 이는 도리어 참소(讒訴)를 초래 하는 결과가 되어 또다시 추방당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그 후 10년간 오직 조국애에 불타는 굴원은 망명도 하지 않고 한결같 이 동정호(洞庭湖) 주변을 방랑하다가 마침내 울분이
복받친 나머지 멱라(汨羅:동정호 남쪽 을 흐르는 강)에 몸을 던져 수중 고혼(水中孤魂)이 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굴원의 넋을
'멱 라의 귀[汨羅之鬼]'이라 일컫고 있다.
"초사(楚辭)"에 실려 있는 굴원의 작품 중 대부분은 이 방랑 시절에 씌어진 것들이다. 그는 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걱정하고
나라를 그르치는 영신을 미워하며 그의 고고한 심정을 정열적으로 노래했는데 '징갱취제'는"초사"〈9장〉중
'석송(惜誦)'이란 시의 첫 구절이다.
뜨거운 국에 데어서 냉체까지 불고 먹는데 [懲於羹者 而吹?兮 (징어갱자 이취제혜)]
어찌하여 그 뜻(나약함)을 바꾸지 못하는가 [何不變此志也(하불변차지 야)] ‥‥‥‥‥‥
'석송'은 굴원이 자기 이상으로 주군(主君)을 생각하고 충성을 맹세하 는 선비가 없음을 슬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뭇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것을 분노하며 더 욱이 어쩔 수 없는 고독을 한탄하면서도 그 절조만은 변절하지 않겠다는
강개지심(慷慨之 心)을 토로한 시이다.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 곧 상대방과 자신의 약점과 강점을 알아보고 승산(勝算)이 있을 때 싸워야 이길수 있다는 말.
춘추 시대,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패업을 도운 손무(孫武)는 전국 시대에 초(楚)나라의 병법가로서《오자(吳子)》를 쓴
오기(吳起)와 더불어 병법의 시조라 불 리는데 그가 쓴《손자(孫子)》〈모공편(謀攻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적과 아군의 실정을 잘 비교 검토한 후 승산이 있을 때 싸운다면 백 번을 싸워도 결코 위태롭지 아니하다[知彼知己
百戰不殆]. 그리고 적의 실정은 모른 채 아군 의 실정만 알고 싸운다면 승패의 확률은 반반이다. 또 적의 실정은 물론 아군의
실정까지 모르고 싸운다면 만 번에 한 번도 이길 가망이 없다."
[주] 여기서 말하는 '백(百)'이란 단순한 숫자상의 '100'이 아니라 '삼 (三)''칠(七)''구(九)''천(千)''만(萬)'등과 같이 '많은 횟수'를
가리키는 것임.
창업수성(創業守成)
일을 시작하기는 쉬우나 이룬 것을 지키기는 어렵다는 말.
수(隋:581∼619)나라 말의 혼란기에 이세민(李世民)은 아버지인 이연 (李淵)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관중(關中)을 장악했다.
이듬해(618) 2세 양제(煬帝)가 암살되 자 이세민은 양제의 손자인 3세 공제(恭帝)를 폐하고 당(唐:618∼907) 나라를 '창업'했다.
626년 고조(高祖) 이연에 이어 제위에 오른 2세 태종(太宗) 이세민은 우선 사치를 경계하고, 천하 통일을 완수하고,
외정(外征)을 통해 국토를 넓히고, 제도적으로 민생 안정을 꾀하고, 널리 인재를 등용하고, 학문, 문화 창달에 힘씀으로써
후세 군왕이 치 세(治世)의 본보기로 삼는 성세(盛世)를 이룩했다. 이 성세를 일컬어 '정관의 치[貞觀之治:태 종 정관
연간(627∼649)의 치세]'라고 한다.
'정관의 치'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결단력이 뛰어난 좌복야(左僕 射) 두여회(杜如晦), 기획력이 빼어난 우복야(右僕射)
방현령(房玄齡), 강직한 대부(大夫) 위 징(魏徵) 등과 같은 많은 현신들이 선정(善政)에 힘쓰는 태종을 잘 보필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태종은 이들 현신이 모인 자리에 이런 질문을 했다.
"창업과 수성은 어느 쪽이 어렵소?"
방현령이 대답했다.
"창업은 우후 죽순(雨後竹筍)처럼 일어난 군웅 가운데 최후의 승리자 만이 할 수 있는 것인 만큼, 창업이 어려운 줄로
아나이다."
그러나 위징의 대답은 달랐다.
"예로부터 임금의 자리는 간난(艱難) 속에서 어렵게 얻어, 안일(安逸) 속에서 쉽게 잃는 법이옵니다. 그런 만큼 수성이
어려운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러자 태종이 말했다.
"방공(房公)은 짐과 더불어 천하를 얻고, 구사 일생(九死一生)으로 살 아났소. 그래서 창업이 어렵다고 말한 것이오. 그리고
위공(魏公)은 짐과 함께 국태민안(國 泰民安)을 위해 항상 부귀에서 싹트는 교사(驕奢:교만하고 사치함)와 방심에서 오는
화란(禍 亂)을 두려워하고 있소. 그래서 수성이 어렵다고 말한 것이오. 그러나 이제 창업의 어려움은 끝났소. 그래서 짐은
앞으로 제공(諸公)과 함께 수성에 힘쓸까 하오."
천고마비(天高馬肥)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 곧 ① 하늘이 맑고 오곡 백과(五穀百果)가 무르익는 가을을 형용하는 말. ② (흉노에게 있어, 전하여 오늘날에는 누구에게나) 활약(동) 하기 좋은 계절을 이르는 말.
은(殷)나라 초기에 중국 북방에서 일어난 흉노는 주(周), 진(秦),한(漢) 의 삼왕조(三王朝)를 거쳐 육조(六朝)에 이르는 근
2000년 동안 북방 변경의 농경 지대를 끊임없이 침범 약탈해 온 표한(剽悍)한 유목 민족이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의 군주들은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늘 고심했는 데 전국시대에는 연(燕), 조(趙), 진(秦)나라의 북방
변경에 성벽을 쌓았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기존의 성벽을 수축(修築)하는 한편, 증축 연결(增築連結)하여
만리장성(萬 里長城)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흉노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다. 북방의 초원에서 방목과 수렵 으로 살아가는 흉노에게 우선 초원이 얼어붙는 긴
겨울을 살아야 할 양식이 필요했기 때문 이다. 그래서 북방 변경의 중국인들은 '하늘이 높고 말이 살지는[天高馬肥]' 가을만
되면 언 제 흉노가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戰戰兢兢)했다고 한다.
천려일실(千慮一失)
천 가지 생각 가운데 한가지 실책이란 뜻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하나쯤은 실책이 있을 수 있다는 말.
한나라 고조의 명에 따라 대군을 이끌고 조(趙)나라로 쳐들어간 한신 (韓信)은 결전을 앞두고 '적장 이좌거(李左車)를
사로잡는 장병에게는 천금을 주겠다'고 공 언했다. 지덕(知德)을 겸비한 그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전 결과 조나라는
괴멸했고, 이좌거는 포로가 되어 한신 앞에 끌려 나왔다.
한신은 손수 포박을 풀어 준 뒤 상석에 앉히고 주연을 베풀어 위로했 다. 그리고 한나라의 천하 통일에 마지막 걸림돌로
남아 있는 연(燕), 제(齊)에 대한 공략책 을 물었다. 그러나 이좌거는 '패한 장수는 병법을 논하지 않는 법[敗軍將
兵不語]'이라며 입 을 굳게 다물었다. 한신이 재삼 정중히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패장이 듣기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반드 시 하나쯤은 실책이 있고[智者千慮 必有一得]고
했습니다. 그러니, 패장의 생각 가운데 하나 라도 득책이 있으면 이만 다행이 없을까 합니다."
그 후 이좌거는 한신의 참모가 되어 크게 공헌했다고 한다.
천의무봉(天衣無縫)
하늘의 직녀가 짜 입은 옷은 솔기가 없다는 뜻으로,
① 詩文 등이 매우 자연스러워 조금도 꾸민 데 가 없음을 이름.
② 완전 무결함. "出典" '太平廣記' 鬼怪神寄
곽한(郭翰)이 뜰에 누웠는데 절세미인이 나타나서,
"저는 천상(天上)의 직녀(織女)이온데, 남편과 오래 떨어져 있어 울화병이 생겨서, 상제(上帝)의 허락을 받고 요양차
내려왔습니다."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기를 요구하더니 매일 밤 찾아왔다. 칠월 칠석이 되자 며칠 안오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 래서, "남편[牽牛]과의 재미는 좋았소?" 하자, "천상의 사랑은 지상의 사랑 과 다릅니다.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니 질투는
마십시오." 했다.
곽한이 조용히 그녀의 옷을 살펴보니, 바느질한 곳이 전혀 없었다. 이 상해서 물으니, "하늘의 옷은 원래 바늘이나 실로
꿰매는 것이 아닙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가 벗은 옷은 그녀가 돌아갈 때면 저절로 가서 그녀의 몸에 입히는
것이었다.
徐視其衣竝無縫 翰問之 謂翰曰 天衣本非針線爲也 每去 輒以衣服 自隨.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날, 직녀(織女)의 시녀가 소식을 한 번 전한 이후로 소식이 끊겼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곽한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미인을 보더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집안의 혈통을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해 싫어도 아내를
맞이했 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고 부부의 사이도 좋지 않아 아들도 얻지 못한 채로 끝나고 말았다.
천재일우(千載一遇)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기회
동진(東晉)의 학자로서 동양 태수(東陽太守)를 역임한 원굉(袁宏)은 여러 문집에 시문(詩文) 300여 편을 남겼는데, 특히
유명한 것은《文選》에 수록된 '三國名 臣序贊'이다. 이것은《三國志》에 실려 있는 건국 명신 20명에 대한
행장기(行狀記)인데, 그 중 위(魏)나라의 순문약(荀文若)을 찬양한 글에서 원굉은 이렇게 쓰고 있다.
대저 백락(伯樂)을 만나지 못하면, 곧 천년에 한 천리마도 없다.
夫未遇伯樂 則千載無一驥.
말[馬]에 대하여 안목이 높은 말[馬]의 명인 백락을 만나지 못한다면, 천년이 지나도 한 마리의 천리마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어진 신하가 명군(名君)을 만나는 것이 어렵다는 것과 통한다.
대저 만 년의 한 번 기회는 이 세상의 통하는 길이며 천 년에 한 번 좋은 기회를 만나는 것은 현인(賢人)과 지혜 있는 사람의
아름다운 만남이다. 이와같은 기회 를 누구나 기뻐하지 않고는 못 견디니, 기회를 잃으면 누구나 어찌 능히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夫萬歲一期 有生之通塗 千載一遇 賢智之嘉會 遇之不能無欣 喪之 何能無慨.
"동의어" 천재일시(千載一時), 천재일회(千載一會), 천세일시(千歲一 時)
"유사어" 맹귀부(우)목(盲龜浮(遇)木)
철면피(鐵面皮)
① 얼굴에 철판을 깐 듯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는사람. ② 뻔뻔스러워 부끄러워할 줄 모름. 또 그런 사람. ③낯가죽이 두꺼워 부끄러움이 없음. 후안무치(厚顔無恥).
왕광원(王光遠)이란 사람이 있었다. 학재가 뛰어나 진사(進士)시험에 도 합격했으나 출세욕이 지나쳐 그는 고관의 습작시를
보고도 '이태백(李太白)도 감히 미치 지 못할 신운(神韻:신비롭고 고상한 운치)이 감도는 시'라고 극찬할 정도로 뻔뻔한
아첨꾼이 되었다.
아첨할 때 그는 주위를 의식하지 않았고 상대가 무식한 짓을 해도 웃 곤 했다. 한 번은 고관이 취중에 매를 들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를 때려 주고 싶은데, 맞아 볼텐가?"
"대감의 매라면 기꺼이 맞겠습니다. 자 어서…‥."
고관은 사정없이 왕광원을 매질했다. 그래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동석했던 친구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질책하듯
말했다.
"자네는 쓸개도 없나? 만좌(滿座) 중에 그런 모욕을 당하고서도 어쩌 면 그토록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 잘 보이면 나쁠 게 없니."
친구는 기가 막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광원의 낯가죽은 두껍기가 열 겹의 철갑(鐵甲)과 같다."
청담(淸談)
① 명리(名利), 명문(名聞)을 떠난 청아(淸雅)한 이야기. 고상한 이야기. ② 위진 시대에 유행한 노장(老莊)을 조술(祖述)하고 속세를 떠난 청정무위(淸淨無爲)의 공리공론(空理空論).
위진 시대(魏晉時代:3세기 후반)는 정치가 불안정하고 사회가 혼란해 서 자칫하면 목숨을 잃는 난세였다. 게다가 정치적
권력자와 그에 추종하는 세속적 관료들 의 횡포도 극심했다. 그래서 당시 사대부(士大夫) 간에는 오탁(汚濁)한 속세를
등지고 산림 에 은거(隱居)하여 노장(老莊)의 철학이라든가 문예 등 고상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유행이 었다.
그 중에서도 죽림 칠현(竹林七賢), 곧 산도(山濤), 완적(阮籍), 혜강, 완함(阮咸), 유령(劉伶), 상수(尙秀), 왕융(王戎)은 도읍
낙양(洛陽) 근처의 대나무 숲에 은거 하여 아침부터 밤까지 술에 취한 채 '청담'-청신기경(淸新奇警:산뜻하고 기발함)한
이야기, 곧 세속의 명리(名利), 명문(名聞), 희비(喜悲)를 초월한, 고매한 정신의 자유 세계를 주제로 한 노장(老莊)의 철학-을
논하며 명교(名敎:儒敎) 도덕에 저항했다.
청천백일(靑天白日)
푸른 하늘에 쨍쨍하게 빛나는 해라는 뜻. 곧 ① 맑게 갠 대낮. ② 뒤가 썩 깨끗한 일. ③ 원죄가 판명되어 무죄가 되는 일. ④ 푸른 바탕의
한복판에 12개의 빛살이 있 는 흰 태양을 배치한 무늬.
당나라 중기의 시인, 정치가인 한유[韓愈:자는 퇴지(退之), 768∼824] 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굴지의 명문장가로
꼽혔던 사람인데 그에게는 최군(崔群)이 라는 인품이 훌륭한 벗이 있었다. 한유는 외직(外職)에 있는 그 벗의 인품을 기리며
〈최군 에게 주는 글[與崔群書]〉을 써 보냈는데 명문(名文)으로 유명한 그 글 속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들이 저마다 좋고 싫은 감정이 있을 터인데 현명한 사람이든 어 리석은 사람이든 모두 자네를 흠모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봉황(鳳凰)과 지초[芝草:영지(靈 芝)]가 상서로운 조짐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며 '청천 백일'이 맑고
밝다는 것은 노예인들 모를 리 있겠는가?"
"주" 여기서 '청천백일'이란 말은 최군의 인품이 청명(淸明)하다는 것 이 아니라 최군처럼 훌륭한 인물은 누구든지
알아본다는 뜻임.
당송팔대가 : 당(唐:618∼906)나라와 송(宋:北宋, 960∼1127)나라 시대 의 여덟 명의 저명한 문장 대가(大家). 곧 당나라의
한유(韓愈:韓退之) 유종원(柳宗元:柳子 厚), 송나라의 구양수(歐陽脩:歐永叔) 왕안석(王安石:王介甫) 증공(曾鞏:會子固)
소순(蘇洵:蘇 明允) 소식(蘇軾:蘇東坡) 소철(蘇轍:蘇子由). 당송 팔가, 팔대가라고도 일컬음.
청천벽력(靑天霹靂)
맑게 갠 하늘의 벼락(날벼락)이란 뜻. ① 약동하는 필세(筆勢)의 형용. ② 생각지 않았던 무서운 일. ③ 갑자기 일어난 큰 사건이나 이변(異變)의 비유.
이 말은 남송(南宋)의 대시인 육유[陸游:호(號)는 방옹(放翁)]의《검남 시고(劍南詩稿)》〈9월4일
계미명기작(九月四日鷄未鳴起作)〉에 나오는 오언절구(五言絶句) 의 끝 구절이다.
방옹이 병으로 가을을 지내고 [放翁病過秋(방옹병과 추)]
홀연히 일어나 취하여 글을 쓰니 [忽起作醉墨(홀기작취묵)]
정히 오래 움츠렸던 용과 같이 [正如久蟄龍(정여구칩룡)]
푸른 하늘에 벼락을 치네 [靑天飛霹靂(청천비벽력)]
청운지지(靑雲之志)
① 속세에 초연한 태도. ②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욕 망.
장구령은 현종(玄宗) 때의 어진 재상으로 간신 이임보(李林甫)의 모략 으로 인해 벼슬길에서 파직되어 초야에서
여생(餘生)을 보냈다. 다음은 그가 재상의 자리에 서 물러났을 때의 감회를 읊은 시이다.
옛날 청운의 뜻을 품고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다 늙은 지금에 와서 차질을 빚게 되었다.
누가 알리요 밝은 거울 속의 그림자와
그것을 보고 있는 내가 서로 측은히 여기고 있는 것을.
宿昔靑雲志 蹉跌白髮年
誰知明鏡裏 形影自相潾
오늘날, 보통이 아닌 큰 뜻, 입신출세에 대한 야망을 '청운의 뜻'이라 고 말한다. 그러나 원래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청운'이라는 말은 옛날《史記》'伯夷列 傳'에도 나오며, 다음과 같이 쓰여지고 있다.
항간의 사람들은 행실을 닦아 이름 세우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靑雲의 선비라고 붙이는 것이 아니니, 어찌 능히 후세에 베풀
수 있으랴!
閭巷之人 欲砥行立名者 非附靑雲之士 惡能施于後世 哉.
청출어람(靑出於藍)
쪽에서 나온 물감이 쪽보다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나음을 일컫는 말.
이 말은 전국시대의 유학자(儒學者)로서 성악설(性惡說)을 창시한 순 자(荀子)의 글에서 나오는 한 구절이다.
학문은 그쳐서는 안 된다.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이루었지만
물보다 더 차다.
學不可以己 靑取之於藍 而靑於藍 氷水爲之 而寒於水.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끊임없이 발전과 향상을 목표로 하여 노력해 야 하고 중도에서 그만두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학문은 더욱 깊어지고 순화되어 한 걸음씩 완성에 가까워질 수 있다. 여기서 '푸름과 얼음'의 비유가
등장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학문과 마차가지로 그 과정을 거듭 쌓음으로써 그 성질 이 더욱 깊어지고
순화되어 가는 것이다. 스승에게 배우기는 하지만 그것을 열심히 익히고 행함으로써 스승보다 더 깊고 높은 학문과 덕을
갖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스승이 너무 훌륭 하면 훌륭할수록 그를 능가하기는 어렵다.
"준 말" 출람(出藍)
"동의어" 출람지예(出藍之譽), 출람지재(出藍之才), 후생각고(後生角 高), 출람지영예(出藍之榮譽)
촌철살인(寸鐵殺人)
간단한 경구(警句)로 어떤 일의 급소를 찔러 사람을 감동시킴의 비유
'학림옥로(學林玉露)'라는 책은 남송(南宋) 때의 나대경(羅大徑)이, 찾 아오는 손님들과 주고받은 청담(淸談)을
시동(侍童)에게 기록하게 한 것으로 '天 地 人'의 세 부분 18권으로 구성된 책이다.
그 중 '지부(地部)' 제7권 <살인수단(殺人手段)>에는 종고선사 (宗?禪師)가 다음과 같이 선(禪)을 논하여 말했다.
비유하면 한 수레의 병기를 싣고서 하나를 희롱하여 마치면 또 다른 하나를 꺼내 가지고 와서 희롱함과 같지만, 이것이 곧
사람을 죽이는 수단은 아니다. 나는 곧 단지 촌철(寸鐵)이 있으므로, 문득 사람을 죽일 수 있다.
宗?論禪曰 譬如人載一車兵器 弄了一件 又取出一件來弄 便不是殺人手段 我則只有寸鐵 便可殺人.
이것은 그가 선(禪)의 요체(要諦)를 갈파한 말이므로, 살인이라고 하 지만 물론 칼날로 상처를 입히는 것을 뜻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 속의 속된 생각을 없애는 것'을 뜻한다.
아직 크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그 속된 생각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성급하게 이것 저것 대답을 해 오겠지만, 정신의
집중이 부족하기 때문에 모두 날것 들뿐이다. 그와 같은 칼로는 몇 천 몇 만 개나 되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모든
일에 온 몸과 온 정성을 다 기울일 때, 충격적으로 번득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큰 깨달음인 것이다.
축록자불견산(逐鹿者不見山)
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한다는 뜻. 곧 ① 명예와 이욕(利慾)에 미혹(迷惑)된 사람은 도리도 저버림. ② 이욕에 눈이 먼 사람은 눈앞의 위험도 돌보지 않음. 또는 보지 못함. ③ 한 가지 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은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음.
전한(前漢) 7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 중앙 정권에 대항적인 입장을 취했던 왕족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 : ? ∼ B.C.122)은
문하(門下) 식객(食客)의 도움을 받아 많은 서책을 저술했는데, 그중 특히 도가(道家)사상을 중심으로 엮은《회남자(淮南
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하고
[逐鹿者 不見山(축록자 불견산)]
돈을 움키는 사람은 사람을 보지 못한다.
[攫金者 不見人(확금자 불견인)]
치인설몽(癡人說夢)
바보에게 꿈 이야기를 해준다는 뜻. 곧 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의
비유. ② 종작없이 지껄이는 짓의 비유. ③ 이야기가 상대방에게 이해되지 않음의 비유.
남송(南宋:1127∼1279)의 석혜홍(釋惠洪)이 쓴 "냉재야화(冷齋夜話)" 〈권9(卷九)〉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당나라 시대, 서역(西域)의 고승인 승가(僧伽)가 양자강과 회하(淮河) 유역에 있는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지방을
행각(行脚: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수행함)할 때의 일이다. 승가는 한 마을에 이르러 어떤 사람과 이런 문답을 했다.
"당신은 성이 무엇이오[汝何姓]?"
"성은 하가요[姓何哥]."
"어느 나라 사람이오[何國人]?"
"하나라 사람이오[何國人]."
승가가 죽은 뒤 당나라의 서도가(書道家) 이옹(李邕)에게 승가의 비문 을 맡겼는데 그는 '대사의 성은 하 씨(何氏)이고
하나라 사람[何國人]이다'라고 썼다. 이옹은 승가가 농담으로 한 대답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석혜홍은 이옹의 이 어리석음에 대해《냉재야화》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는 곧 이른바 어리석은 사람에게 꿈을 이야기한 것이다[此正所謂 對癡說夢耳].' 이옹은 결국 꿈을 참인 줄 믿고 말았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주" '치인설몽'이란 말은 요즈음에는 본뜻과는 반대로 바보(치인)가 ' 종작없이 지껄인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음.
이옹 : 일명 이북해(李北海), 678∼747. 특히 행서(行書)에 능하여 생 전에 쓴 비서(碑書)가 800여에 이른다고 함.
칠보지재(七步之才)
일곱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시를 지을 수 있는 재주라는 뜻으로, 아주 뛰 어난 글재주를 이르는 말.
삼국 시대의 영웅이었던 위와(魏王) 조조(曹操)는 문장 출신이었지만 건안(建安) 문학의 융성을 가져왔을 정도로 시문을
애호하여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맏아들인 비(丕:186∼226)와 셋째 아들인 식(植)도 글재주가
출중했다. 특히 식의 시재(詩才)는 당대의 대가들로부터도 칭송이 자자했다. 그래서 식을 더욱 총애하 게 된 조조는 한때
비를 제쳐놓고 식으로 하여금 후사(後嗣)를 잇게 할 생각까지 했었다.
비는 어릴 때부터 식의 글재주를 늘 시기해 오던 차에 후사 문제까지 불리하게 돌아간 적도 있고 해서 식에 대한 증오심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조조가 죽은 뒤 위왕을 세습한 비는 후한(後漢)의 헌제(獻帝:189∼ 226)를 폐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문제(文帝:220∼226)라 일컫고 국호를 위(魏)라고 했다.
어느 날, 문제는 동아왕(東阿王)으로 책봉된 조식을 불러 이렇게 하명 했다.
"일곱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시를 짓도록 하라. 짓지 못할 땐 중벌을 번치 못할 것이니라."
조식은 걸음을 옮기며 이렇게 읊었다.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煮豆燃豆기(자두연두기)]
가마솥 속에 있는 콩이 우는구나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어찌하여 이다지도 급히 삶아 대는가 [相煎何太急(상전하태 급)]
'부모를 같이하는 친형제간인데 어째서 이다지도 심히 핍박(逼迫)하는 가'라는 뜻의 칠보시(七步詩)를 듣자 문제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주" 이후 '자두연두기' 약하여 '자두연기'는 '형제 혹은 동족간의 싸 움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