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事成語(고사성어)

[ㄱ], [ㄴ/ㄷ/ㅁ], [ㅂ], [ㅅ], [ㅇ], [ㅈ/ㅊ], [ㅌ/ㅍ/ㅎ]


타산지석(他山之石)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일지라도 자기의 지덕(知德)을 연마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말.
이 말은《詩經》'小雅'의 <학의 움음(鶴鳴)>에 실려 있다.

학이 높은 언덕에서 울거늘, 그 소리는 온 들에 들리는도다.
물고기가 잠겨 연못에 있다가, 혹은 물가로 나와 노는도다.
저 동산에는 즐겁게도, 이에 심어놓은 박달나무가 있으며,
그 아래에 오직 개암나무가 있도다.
남의 산의 돌도, 가히 써 숫돌로 삼을 수 있도다.
학이 높은 언덕에서 울거늘, 그 소리 하늘에 들리는도다.
물고기가 물가에 있다가, 혹은 잠기어 연못에 있도다.
저 동산에는 즐겁게도, 이에 심어놓은 박달나무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오직 닥나무가 있도다.
남의 산의 돌에, 가히 써 구슬을 갈 수 있도다.

鶴嗚于九皐 聲聞于野
魚潛在淵 或在于渚
樂彼之園 愛有樹檀
其下維?
他山之石 可以爲錯
鶴嗚于九皐 聲聞于天
魚在于渚 或潛在淵
樂彼之園 爰有樹檀
其下維穀
他山之石 可以攻玉

"유사어" 절차탁마(切磋琢磨), 공옥이석(攻玉以石)

태산북두(泰山北斗)

① 태산과 북두성. ② 세상 사람으로부터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
唐나라 때 4대 시인(四大詩人)의 한 사람으로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 家) 중 굴지의 명문장가로 꼽혔던 한유(韓愈 : 字는 退之)는 768년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에서 태어났다.
그는 9대 황제인 덕종(德宗 : 779-805) 때 25세의 나이로 진사(進士) 시험에 급제한 뒤 이부상서(吏部尙書)까지 되었으나 황제가 관여하는 불사(佛事)를 극간(極 諫)하다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천성이 강직했던 한유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좌천, 파직(罷職) 당했다가 다시 등용되곤 했는데 만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역임한 뒤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순탄치 못했던 그의 벼슬살이와는 달리 한유는 '한유(韓柳)'로 불렸을 정도로 절친한 벗인 유종원(柳宗元 : 字는 子厚)과 함께 고문부흥(古文復興) 운동을 제창하는 등 학문에 힘썼다. 그 결과 후학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에 대해《唐 書》'韓愈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나라가 흥성한 이래 한유는 육경(六經) 을 가지고 여러 학저들의 스승이 되었다. 한유가 죽은 뒤 그의 학문은 더욱 흥성했으며, 그 래서 학자들은 한유를 '泰山北斗'를 우러러보듯 존경했다.
自愈沒 其言大行 學者仰之 如泰山北斗云.

"준 말" 태두(泰斗), 산두(山斗)
"동의어" 여태산북두(如泰山北斗)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는 뜻. 곧 쓸모가 있을 때는 긴요하게 쓰이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헌신 짝처럼 버려진다는 말.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를 멸하고 한(漢)나라의 고조(高祖)가 된 유 방(劉邦)은 소하(蕭何) 장량(張良)과 더불어 한나라의 창업 삼걸(創業三傑) 중 한 사람인 한신(韓信)을 초왕(楚王)에 책봉했다.(BC 200)
그런데 이듬해, 항우의 맹장(猛將)이었던 종리매(鍾離昧)가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고조(高祖)는 지난날 종리매에게 고전했던 악몽이 되살아 나 크게 노했다. 그래서 한신에게 당장 압송하라고 명했으나 종리매와 오랜 친구인 한신은 고조의 명을 어 기고 오히려 그를 숨겨 주었다.
그러자 고조(高祖)에게 '한신은 반심(反心)을 품고 있다'는 상소가 올 라왔다. 진노한 고조는 참모 진평(陳平)의 헌책(獻策)에 따라 제후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모든 제후(諸侯)들은 초(楚) 땅의 진(陳:河南省 內)에서 대기하 다가 운몽호(雲夢湖)로 유행(遊幸)하는 짐을 따르도록 하라."
한신이 나오면 진(陳)에서 포박하고, 만약 나오지 않으면 진(陳)에 집 결한 다른 제후들의 군사로 한신을 주살(誅殺)할 계획이었다.
고조의 명을 받자 한신은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래서 '아예 반 기(反旗)를 들까'하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죄가 없는 이상 별일 없을 것'으로 믿고서 순순 히 고조를 배알하기로 했다. 그러나 불안이 싹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한신은 자결한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고조를 배알(拜謁)했다. 그러나 역적으로 포박 당하자 한신는 분개하 여 이렇게 말했다.
교활한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좋은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 하늘 높이 나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은 곳간에 처박히며, 적국을 쳐부수고 나면 지혜 있는 신하는 버림을 받는다고 하더니 한(漢)나라를 세우기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한 내가, 이번에는 고조의 손에 죽게 되는구나.

果若人言 狡兎死 良狗烹 高鳥盡 良弓藏 敵國破 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

"원 말" 교토사 양구팽(狡兎死 良狗烹)
"도의어" 야수진 엽구팽(野獸盡 獵狗烹)

퇴고(推敲)

민다, 두드린다는 뜻으로, 시문(詩文)을 지을 때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침을 이르는 말.
당나라 때의 시인 가도[賈島:자는 낭선(浪仙),777∼841]가 어느 날, 말 을 타고 가면서〈이응의 유거에 제함[題李凝幽居]〉이라는 시를 짓기 시작했다.

이웃이 드물어 한거하고 [閑居隣竝少(한거린병소)]
풀숲 오솔길은 황원에 통하네 [草徑入荒園(추경입황원)]
새는 연못가 나무에 잠자고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 [僧敲月下門(승고월하 문)]

그런데 마지막 구절인 '중은 달 아래 문을……'에서 '민다[推]'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두드린다[敲]'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여기서 그만 딱 막혀 버렸다. 그래 서 가도는 '민다''두드린다'는 이 두 낱말만 정신없이 되뇌며 가던 중 타고 있는 말이 마주 오던 고관의 행차와 부딪치고 말았다.
"무례한 놈! 뭣하는 놈이냐?"
"당장 말에서 내려오지 못할까!"
"이 행차가 뉘 행찬 줄 알기나 하느냐?"
네댓 명의 병졸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으며 가도를 말에서 끌어내 려 행차의 주인공인 고관 앞으로 끌고 갔다. 그 고관은 당대(唐代)의 대문장가인 한유(韓愈) 로, 당시 그의 벼슬은 경조윤(京兆尹:도읍을 다스리는 으뜸 벼슬)이었다.
한유 앞에 끌려온 가도는 먼저 길을 비키지 못한 까닭을 솔직히 말하 고 사죄했다. 그러자 한유는 노여워하는 기색도 없이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엔 역시 '민다'는 '퇴(推)'보다 '두드린다'는 '고(敲)'가 좋겠네."
이를 계기로 그후 이들은 둘도 없는 시우(詩友)가 되었다고 한다.
"주" 가도 : 당나라의 시인. 하북성 범양(河北省范陽) 사람. 자는 낭선 (浪仙). 일찍이 불문(佛門)에 들어감. 법명(法名)은 무본(無本). 한유(韓愈)와의 사귐을 계기 로 환속(還俗)한 후 시작(詩作)에 전념함.

파죽지세(破竹之勢)

대적(大敵)을 거침없이 물리치고 쳐들어 가는 당당한 기세.
위(魏)나라의 권신(權臣) 사마염(司馬炎)은 원제(元帝)를 폐한 뒤 스스 로 제위(帝位)에 올라 무제(武帝:265-290)라 일컫고, 국호(國號)를 진(晉)이라고 했다. 이리하 여 천하는 3국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오(吳)나라와 진(晉)나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이윽고 무제는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두예(杜預)에게 출병을 명했 다. 이듬해(280년) 2월, 무창(武昌)을 점령한 두예는 휘하 장수들과 오나라를 일격에 공략할 마지막 작전 회의를 열었다. 이 때 한 장수가 이렇게 건의했다.
"지금 당장 오나라의 도읍을 치기는 어렵습니다. 이제 곧 잦은 봄비로 강물은 범람할 것이고, 또 언제 전염병이 발생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단 철군했다가 겨울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찬성하는 장수들도 많았으나 두예는 단호히 말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지금 아군의 사기는 마치 '대나무를 쪼개 는 기세[破竹之勢]'요, 대나무란 처음 두 세 마디만 쪼개면 그 다음부터는 칼날이 닿기만 해 도 저절로 쪼개지는 법인데, 어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버린단 말이오."
두예는 곧바로 휘하의 전군을 휘몰아 오나라의 도읍 건읍(建業 : 南 京]으로 쇄도(殺到)하여 단숨에 공략했다. 이어 오왕(吳王) 손호(孫晧)가 항복함에 따라 마침 내 진(晉)나라는 삼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천하를 통일했다.
옛날에 악의(惡毅)는 제서(齊西)의 한 번 싸음에서 승리하여, 강한 齊 나라를 합쳤다. 지금 아군은 위세를 이미 떨치고 있다. 비유하면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 다. 몇 마디를 쪼갠 다음에는 다 칼날을 맞아 쪼개어질 것이니, 다시 손을 댈 곳이 없다.

昔樂毅藉齊西一戰 以幷彊齊 今兵威己振 譬如破竹 數節之後 皆迎 刃而解 無復著手處也

"동의어" 영인이해(迎刃而解), 세여파죽(勢如破竹)

포호빙하(暴虎馮河)

맨손으로 범에게 덤비고 걸어서 황하를 건넌다는 뜻. 곧 무모한 행동. 죽 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모한 용기의 비유.
공자의 3000여 제자 중 특히 안회(顔回)는 학재(學才)가 뛰어나고 덕 행이 높아 공자가 가장 아끼던 제자라고 한다. 그는 가난하고 불우했지만 이를 전혀 괴로워 하지 않았으며 또한 32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노하거나 실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이 안회에게 어느 날,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왕후(王侯)에게 등용되면 포부를 펴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이를 가슴 깊이 간직해 두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는 나와 너 두 사람 정도일 것이다."
이 때 곁에서 듣고 있던 자로(子路)가 은근히 샘이 나서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도를 행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만약 대군을 이끌고 전쟁에 임할 때 선생님은 누구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무용(武勇)에 관한 한 자신 있는 자로는 '그야 물론 너지'라는 말이 떨어지기를 기대했으나 공자는 굳은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맨손으로 범에게 덤비거나 황하를 걸어서 건너는 것[暴虎馮河]과 같 은 헛된 죽음을 후회하지 않을 자와는, 나는 행동을 같이하지 않을 것이다."

표사유피(豹死留皮)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뜻. 사람은 사후(死 後)에 이름을 남겨야 함의 비유.
왕언장(王彦章)은 한갓 병졸에서 시작하여 후량(後梁) 태조(太祖) 주 전충(朱全忠)의 장군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용기와 힘으로 쇠창을 옆에 끼고 촉한(蜀漢)의 조자룡처럼 적진을 누벼 군사들은 그를 왕철창(王鐵槍)이라 불렀다.
그는 후량(後梁)이 멸망할 때 겨우 500의 기병을 거느리고 수도를 지 키다 상처를 입고 포로가 되었다. 후당(後唐)의 장종(藏宗) 이존욱은 그의 무용을 아껴 부하가 되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왕언장은,
"신은 폐하와 10여 년이나 싸워 이제 패군지장(敗軍之將)이 되 었습니다. 죽음 외에 또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또 아침에 양(梁)나라, 저녁에 진(晉:後唐)나 라를 섬긴다면 살아서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하겠습니까?"하고 죽음의 길을 택했다.
그는 글을 배우지 못해 무식했으나, "표범은 죽으면 가죽을 남 기고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을 언제나 말하고 지키겠다."고 하였다.

彦章武人不知書 常爲俚語謂人曰 豹死留皮 人死留名.

"동의어"호사유피(虎死留皮)

풍성학려(風聲鶴)

겁을 먹은 사람이 하찮은 일에도 놀람의 비유.
동진(東晉)의 명장 사현(謝玄)은 진왕(秦王) 부견(符堅)이 직접 이끌고 내려온 백만에 가까운 군사를 맞아 겨우 10분의 1밖에 안되는 적은 군사로써 이를 회하(淮 河) 상류인 비수(?水)에서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한 대승리를 거두었다.
사현(謝玄)이 대승을 하게 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진(晉)의 재상 사안(謝安)은 동생 사석(謝石)과 조카인 사현(謝玄)을 선봉으로 삼아 8만의 군사로 서진(西秦)의 백만 대군을 맞이했다.
그리고 사현은 적의 총지휘관인 부융(符融)에게 사자를 보내 이렇게 청했다.
"귀하의 군대를 조금만 뒤로 후퇴시켜 주시오. 그러면 우리가 물을 건너가 한 번 싸움으로 승부를 하겠습니다."
군사의 수(數)를 믿고 상대를 깔보고 있던 부견과 부융은 얼마 안되 는 적이 물을 반쯤 건너왔을 때 기습작전으로 간단히 이를 해치울 생각으로 사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부융의 북군이 후퇴를 개시하고 남군이 강을 건너기 시작했을 때 북 군 내에서 뜻하지 않은 혼란이 일어났다. 그것은 물러나라는 명령을 받은 북군은 남군이 강 을 건너오는 것 을 보자 싸움에 패(敗)해서 물러나는 것으로 오인하고 앞을 다투어 달아나 기 시작했기 때 문이다. 뒤쪽에 있던 군사들은 앞의 군사가 허둥지둥 도망쳐 오는 것을 보 자 덩달아 겁을 먹고 정신없이 달아났다.
이리하여 북군은 자기 군사가 모두 적군으로 보이는 혼란 속에서 서 로 짓밟으며 달아나다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남은 군사들은 갑옷을 벗어 던지고 밤을 새워 달아나며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진(晉)나라 군사가 뒤쫓아 온 걸로 알고 길도 없는 가시밭 속을 헤 매며 한데서 밤을 보냈다. 거기에다 굶주림과 추위까지 겹쳐 죽은 사람이 열에 일곱 여덟은 되었다. 청각적인 착각과 아울러 산천의 풀과 나무까지 다 적의 군사로 보였다는 초목개병 (草木皆兵)이라는 시각적인 착각도 이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堅衆奔潰 自相答藉 投水死者 不可勝計 ?水爲之不流 餘衆 棄甲宵遁 聞風聲鶴? 皆以爲王師已至 草行露宿 重以飢凍 死者十七八.

필부지용(匹夫之勇)

소인의 깊은 생각 없이 혈기만 믿고 냅다치는 용기.
齊나라 宣王이 물어 보았다.
"이웃나라와 사귀는 데 방법이 있습니까?"
孟子가 대답했다.
"있습니다. 오직 仁者라야 능히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殷나라 湯王이 갈(葛)나라를 섬기고, 周文王이 곤이(昆夷)를 섬겼습니 다. 그리고 오직 지혜있는 왕이라야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越王 구천 (勾踐)이 吳나라를 섬겼습니다.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道를 즐기는 것이요,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道를 두려워하는 것이니, 하늘의 道를 즐기는 사람은 천하를 편안케 하고, 하늘의 道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나라를 편안케 합 니다.《詩經》에도 이르기를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길이 나라를 편안케 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크기도 하여라, 선생의 말씀이여! 그런데 과인에게는 한 가지 병이 있으니, 과인은 용기를 좋아합니다."
"왕께서는 제발 작은 용기를 좋아하시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칼자루를 어루만지고 노려보면서, '제가 어찌 감히 나를 당해낼 것이냐?'하신다면, 이는 필 부(匹夫)의 용기입니다. 이는 곧 한 사람을 대적함이니, 왕께서는 제발 용기를 크게 부리소서."

齊宣王 問曰 交隣國有道乎 孟子對曰 有 惟仁者 爲能以大事小 是故湯 事葛 文王事昆夷 惟智者 爲能以小事大 故 勾踐事吳 以大事小者 樂天者也 以小事大者 畏天者 也 樂天者保天下 畏天者保其國 詩云 畏天之威 干時保之 王曰 大哉言矣 寡人有疾 寡人好勇 對曰 王請無好小勇 夫撫劒疾視曰 彼惡敢當我哉 此匹夫之勇 敵一人者也 王請大之.

학철부어(轍魚)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있는 붕어란 뜻으로, 매우 위급한 경우에 처했거나 몹시 고단하고 옹색함의 비유.
전국 시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했던 장자(莊子)의 이야기이다. 그는 왕후(王侯)에게 무릎을 굽혀 안정된 생활을 하기보다는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 는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러다 보니 가난한 그는 끼니조차 잇기가 어려웠다. 어느 날 장자는 굶다 못해 감하후(監河侯)를 찾아가 약간의 식대를 꾸어 달라고 했다. 그러자 감하후 는 친구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할 수가 없어 이렇게 핑계를 댔다.
"빌려주지. 2,3일만 있으면 식읍(食邑)에서 세금이 올라오는데 그때 삼 백 금(三百金)쯤 융통해 줄 테니 기다리게."
당장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2,3일 뒤에 거금(巨金) 삼백 금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체면 불고하고 찾아온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장자는 내뱉듯이 말했다.
"고맙군. 하지만 그땐 아무 소용없네."
그리고 이어 장자 특유의 비아냥조(調)로 이렇게 부연했다.
"내가 여기 오느라고 걷고 있는데 누가 나를 부르지 않겠나.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니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붕어가 한 마리 있더군.''왜 불렀느냐'고 묻자 붕어는 '당장 말라죽을 지경이니 물 몇 잔만 떠다가 살려 달라'는 겨야. 그래서 나는 귀찮은 나머지 이렇게 말해 주었지. '그래. 나는 2,3일 안으로 남쪽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로 유세 를 떠나는데 가는 길에 서강(西江)의 맑은 물을 잔뜩 길어다 줄 테니 그 때까지 기다리라' 고. 그랬더니 붕어는 화가 나서 '나는 지금 물 몇 잔만 있으면 살 수 있는데 당신이 기다리 라고 하니 이젠 틀렸소. 나중에 건어물전(乾魚物廛)으로 내 시체나 찾으러 와 달라'고 하더 니 그만 눈을 감고 말더군. 자, 그럼 실례했네."

한단지몽(邯鄲之夢)

인생과 영화의 덧없음을 비유한 말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이야기이다. 도사 여옹이 한단(邯鄲 : 河北省 所在)의 한 주막에서 쉬고 있는데 행색이 초라한 젊은이가 옆에 와 앉더니 산동(山東)에 사 는 노생(盧生)이라며 신세 한탄을 하고는 졸기 시작했다. 여옹이 보따리 속에서 양쪽에 구멍 이 뚫린 도자 기 베개를 꺼내 주자 노생은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
노생이 꿈 속에서 점점 커지는 그 베개의 구멍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었다. 노생은 최씨(崔氏)로서 명문인 그 집 딸과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순조롭게 승진했다. 경조윤(京兆尹) 을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 겸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으나 재상이 투기하는 바람에 단 주자사(端州刺史)로 좌천되었다. 3년 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조정에 복귀한 지 얼마 안 되 어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그 후 10년간 노생은 황제를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한 명 재상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어느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렸다. 변방의 장군과 결탁하여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
노생과 함께 잡힌 사람들은 모두 처형 당했으나 그는 환관(宦官)이 힘써 준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수 년 후 원죄(寃罪)임이 밝혀지자 황 제는 노생을 소환하여 중서령(中書令)을 제수(除授)한 뒤 연국공(燕國公)에 책봉하고 많은 은총을 내렸다. 그 후 노생은 모두 권문세가(權門勢家)와 혼인하고 고관이 된 다섯 아들과 열 명의 손자를 거느리고 행복한 만년을 보내다가 황제의 어의(御醫)가 지켜 보는 가운데 80년의 생애를 마쳤다.
노생이 깨어보니 꿈이었다. 옆에는 여전히 여옹이 앉아 있었고 주막 집 주인이 짓고 있던 기장밥도 아직 다 되지 않았다. 노생을 바라보고 있던 여옹은 웃으며 말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네."
노생은 여옹에게 공손히 작별 인사를 하고 한단을 떠났다.

"동의어"한단지침(邯鄲之枕), 한단몽침(邯鄲夢枕), 노생지몽(盧生 之夢), 일취지몽(一炊 之夢), 영고일취(榮枯一炊), 황량지몽(黃梁之夢)

한단지보(邯鄲之步)

자기가 지켜야 할 본분을 모르고 마구 남의 흉내를 내면 두 가지를 다 잃는다는 말.
莊子의 선배인 위모(魏牟)와 명가(名家)인 공손룡(公孫龍)과의 문답 형식으로 된 이야기가 있다.
위모가 공손룡에게 말했다.
"또한 그대는 걷는 법을 배우러 수릉(壽陵)의 젊은이가 한단(邯 鄲)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는가? 아직 그 나라의 걸음걸이에 능하지 못하였는데 제 나라의 걸음걸이마저 잃어, 곧 엎드려 기어서 제 나라로 돌아갔을 뿐일세. 당장 그대가 가지 않는다면 장차 그대의 방법을 잃고 그대의 본분을 잃어버릴 것일세."
공손룡은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하고, 혀가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아, 곧 달려서 도망쳐 갔다.

한우충동(汗牛充棟)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이고 방 안에 쌓 으면 들보에 닿을 정도란 뜻으로, 장서(藏書)가 매우 많음의 비유.
唐나라 중엽의 문장가 유종원(유종원)의 '육문통선생묘표(陸文通先生 墓表)'라는 글이 있는데, 그 첫머리 부분에 이렇게 실려 있다.
孔子께서《春秋》를 짓고서 1500년이 지났다. 이름이 전해지는 사람 이 다섯 있는데, 지금 그 셋을 쓴다. 죽간(竹簡)을 잡고 생각을 초조하게 하여 써 읽고 주석 (註釋)을 지은 자가 백천(百千)이나 되는 학자가 있다. 그들은 성품이 뒤틀리고 굽은 사람들 로, 말로써 서로 공격하고 숨은 일을 들추어 내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지은 책들은 집에 두 면 '창고에 가득 차고', 옆으로 옮기려면 '소와 말이 땀을 흘릴' 정도였다. 孔子의 뜻에 맞 는 책이 숨겨지고, 혹은 어긋나는 책이 세상에 드러나기도 했다. 후세의 학자들은 늙은을 다 하고 기운을 다하여 왼쪽을 보고 오른쪽을 돌아보아도 그 근본을 얻지 못한다. 그 배우는 것에 전념하여, 서로 다른 바를 비방하고, 마른 대나무의 무리가 되며, 썩은 뼈를 지키어 부 자(父子)가 서로 상대를 상처내고, 임금과 신하가 배반하기에 이르는 자가 전 세상에는 많이 있었다. 심하도다. 성인(聖人) 孔子의 뜻을 알기가 어렵도다.

孔子作春秋 千五百年 以名爲傳者五家 今用其三焉 乘?牘 焦思 慮以爲讀注疏說者 百千人矣 攻??怒 以辭氣相擊排冒沒者 其爲書 處則充棟宇 出則汗牛馬 或合而隱 或乖而顯 後之學者 窮老盡氣 左視右顧 莫得其本 則專其所學 以 ?其所異 黨枯竹 護朽骨 以至於父子傷夷 君臣?悖者 前世多有之 甚矣 聖人之 難知也.

형설지공(螢雪之功)

갖은 고생을 하며 부지런히 학문을 닦은 공
晉의 차윤(車胤)은 자(字)가 무자(武子)이다. 어려서 공손하고 부지런 하며 널리 책을 읽었다. 집이 가난하여 항상 기름을 얻지는 못하였다. 여름철에 비단 주머니 로써 수 십 마리의 반딧불을 담고 책을 비춰서 읽으며 밤으로써 낮을 잇더니, 후에 벼슬이 상서랑(尙書郞)에 이르렀다. 지금 사람이 서창(書窓)을 형창(螢窓)이라 함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晉車胤武子 幼 恭勤搏覽 家貧不常得油 夏月以練囊 盛數十螢火 照書讀 之 以夜繼日 後官至尙書郞 今人以書窓 爲螢窓由此也.

晉의 손강(孫康)은 어려서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사귀고 놂이 잡스럽 지 않았으나 집이 가난하여 기름이 없어서 일찍이 눈에 비춰 책을 읽더니, 후에 벼슬이 어 사대부(御史大夫)에 이르렀다. 지금 사람이 서안(書案)을 설안(雪案)이라 함은 이로 말미암 은 것이다.

晉孫康 少 淸介 文遊不雜 嘗映雪讀書 後官至御史大夫 今人 以書案爲 雪案 由此也.

호가호위(狐假虎威)

남의 권세를 빌려 위세를 부림의 비유.
전국시대인 기원전 4세기 초엽, 초(楚)나라 선왕(宣王) 때의일이 다.
어느날 선왕은 위(魏:梁)나라에서 사신으로 왔다가 그의 신하가 된 강 을(江乙)에게 물었다.
"위나라를 비롯한 북방 제국(諸國)이 우리 재상 소해휼(昭奚恤) 을 두려워 하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오?"
"그렇지 않습니다. 북방 제국이 어찌 일개 재상에 불과한 소해 휼 따위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전하, 혹 '狐假虎威'란 말을 알고 계십니까?"
"모르오."
"그러면 들어 보십시오.『어느날 호랑이한테 잡아먹히게 된 여 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잡아먹으면 너는 나를 모든 짐승의 우두머리로 정하신 천제(天帝)의 명을 어기는 것이 되어 천벌을 받게 된다. 만약 내 말을 못 믿겠다면 당장 내 뒤를 따라아 보라구. 나를 보고 달아나지 않는 짐승은 단 한 마리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호랑이는 여우를 따라가 보았더니 과연 여우의 말대로 만나는 짐승마다 혼비백산(魂飛魄散) 하여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짐승들을 달아나게 한 것은 여우 뒤에 있는 호랑이었는 데도 호랑이 자신은 그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이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북방 제국이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은 소해휼이 아니라 그 배후(背後)에 있는 초(楚)나라의 군세(軍勢), 즉 전하의 강병(强兵)입니다."
이처럼 강을이 소해휼을 폄(貶)하는 이유는 아부(阿附)로써 영신 (?臣)이 된 강을에게 있어 왕족이자 명재상인 소해휼은 눈엣가시였기 때문이었다.

虎求百獸而食之 得狐 狐曰 子無敢食我也 天帝使我長百獸 今子食我 是 逆天帝命也 子以我爲不信 吾爲子先行 子隨我後觀 百獸之見我而敢不走乎 虎以爲然 故遂與之 行 獸見之皆走 虎不知獸畏己而走也 以爲畏狐也 今王之地方五千里 帶甲百萬 而專屬之昭奚恤 故北方之畏奚恤也 其實畏王之甲兵也 猶百獸之畏虎也.

"동의어" 가호위호(假虎威狐)
"준 말" 가호위(假虎威)

호연지기(浩然之氣)

① 하늘과 땅 사이에 넘치게 가득찬 넓고도 큰 원기(元氣).
② 자유롭고 유쾌한 마음.
③ 공명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운 바 없는 용기.
공손축(公孫丑)이 "선생님께서는 특히 어느 것에 뛰어나십니 까?"하고 묻자, 孟子는 "나는 남의 말을 잘 알며, 나는 내 浩然之氣를 잘 기르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공손축이 "무엇을 浩然之氣라 합니까?"하고 묻자 孟 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敢問夫子 惡乎長 曰 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 敢問何謂浩然之氣曰,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 기운은 몹시 크고 몹시 굳센 것으로, 그 것을 곧게 길러서 해(害)되게 하지 않는다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게 된다. 그 기운이 됨은 정의와 道에 맞는 것으로 이 기운이 없으면 굶주리게 된다. 이 기운은 안에 있는 옳음 이 모여서 생겨나는 것으로, 밖에서 옳음이 들어와 취해지는 것이 아니다. 행동하여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있으면, 곧 굶주리게 되는 것이다.

難言也 其爲氣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天地之間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也 是集義之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行有不慊於心 則? 矣.

"준 말" 호기(浩氣)
"동의어" 정대지기(正大之氣), 정기(正氣)

호접지몽(胡蝶之夢)

" 나비가 된 꿈이란 뜻.
① 물아(物我)의 구별을 잊음의 비유.
② 만물 일체(萬物一體)의 심정
③ 인생의 덧없음의 비유.
전국시대의 사상가 장자(莊子)는 맹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물(物)의 시비(是非) 선악(善惡) 진위(眞僞) 미추(美醜) 빈부(貧 富) 귀천(貴賤)을 초월하여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제창한 사람이다.
장자가 어느날 꿈을 꾸었다. 자신은 꽃과 꽃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는 즐거운 나비 그 자체였다. 그러나 문득 깨어 보니 자기는 분명 장주(莊周)가 아닌가.
이는 대체 장주(莊周)인 자기가 꿈 속에서 나비가 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나비이고 나비인 자기가 꿈 속에서 장주(莊周)가 된 것일까.
꿈이 현실인가, 현실이 꿈인가. 그 사이에 도대체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추구해 나가면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 아닌가.《莊子》의 이런 우화(寓話)는 독자를 유현(幽玄)의 세계로 끌어들여 생각게 한다.
옛날에 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어, 나비가 된 것을 기뻐하였다. 스스로 즐겨서 뜻하는 대로 가고 있어, 자신임을 알지 못했다. 갑자기 깨달으니 곧 莊周가 되어 있 었다. 알지 못하겠다. 莊周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莊周가 된 것인지를. 莊周 와 나비와는 곧 반드시 구별이 있다. 이것을 자연(自然)이 된다고 말한다.

昔者莊周爲胡蝶 ??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 覺 則??然周也 不知 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유사어" 장주지몽(莊周之夢)

홍일점(紅一點)

① 여럿 가운데서 오직 하나 이채를 띠는 것. ② 많은 남자들 틈에 오직 하나뿐인 여자. ③ 여러 하찮은 것 가운데 단 하나 우수한 것.
북송(北宋) 6대 황제인 신종(神宗) 때 왕안석(王安石:1021∼1086)이란 재상이 있었다. 당시 신법당(新法黨)의 지도인 왕안석은 재상에 임명되자 부국강병을 위한 이른바 '왕안석의 개혁'을 실시했다. 처음에는 구양수(歐陽脩), 사마광(司馬光), 정이[호는 이 천(伊川)], 소식(蘇軾) 등 유명한 문신들이 주축이 된 구법당(舊法黨)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 쳤으나 신종의 적극적인 지지를 배경으로 중단 없이 실행되었다.
왕안석은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으로 꼽혔는데 그의〈영석류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많은 푸른 잎 가운데 한 송이 붉은 꽃
[萬綠叢中 紅一點(만록총중 홍일점)]
사람을 움직이는 봄빛 많은들 무엇하리
[動人春色 不須多(동인춘색 불수다)]

화룡점정(畵龍點睛)

가장 긴요한 부분을 끝내어 완성시킴.
남북조(南北朝)시대, 남조(南朝)인 양(梁)나라에 장승요(張僧繇)라는 사람이 있었다. 우군장군(右軍將軍)과 오흥태수(吳興太守)를 지냈다고 하니 벼슬길에서도 입 신(立身)한 편이지만, 그는 붓 하나로 모든 사물을 실물과 똑같이 그리는 화가로도 유명했다.
어느날, 장승요는 금릉(金陵:南京)에 있는 안락사(安樂寺)의 주지로부 터 용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절의 벽에다 검은 구름을 헤치고 이제라도 곧 하 늘로 날아오를 듯한 네 마리의 용을 그렸다. 물결처럼 꿈틀대는 몸통, 갑옷의 비늘처럼 단단 해 보이는 비늘, 날카롭게 뻗은 발톱에도 생동감이 넘치는 용을 보고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용의 눈에 눈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은 점이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장승요는 이렇게 대답했다.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용은 당장 벽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이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당장 눈동자를 그려 넣으라는 성화독촉(星火督促)에 견디다 못한 장승요는 한 마리의 용에 눈동자를 그려 넣기 로 했다. 그는 붓을 들어 용의 눈에 '획'하니 점을 찍었다. 그러자 돌연 벽 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펴지더니 한 마리의 용이 튀어나와 비늘을 번뜩이며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은 용은 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張僧繇於金陵安樂寺 畵四龍於壁 不點睛 每曰 點之則飛去 人以爲誕因 點其一 須臾雷電破壁 一龍乘雲上天 不點睛者見在.

화사첨족(畵蛇添足)

쓸데없는 군일을 하다가 도리어 실패함.
전국시대인 초(楚)나라 회황(懷王) 때의 이야기이다.
어떤 인색한 사람이 제사를 지낸 뒤 여러 하인들 앞에 술 한 잔을 내 놓으면서 나누어 마시라고 했다. 그러자 한 하인이 이런 제안을 했다.
"여러 사람이 나누어 마신다면 간에 기별도 안 갈 테니, 땅바닥 에 뱀을 제일 먼저 그리는 사람이 혼자 다 마시기로 하는 게 어떻겠나?"
"그렇게 하세."
하인들은 모두 찬성하고 제각기 땅바닥에 뱀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윽고 뱀을 다 그린 한 하인이 술잔을 집어들고 말했다.
"이 술은 내가 마시게 됐네. 어떤가, 멋진 뱀이지? 발도 있고."
그 때 막 뱀을 그린 다른 하인이 재빨리 그 술잔을 빼앗아 단숨에 마셔 버렸다.
"세상에 발 달린 뱀이 어디 있나?"
술잔을 빼앗긴 하인은 공연히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후회했지만 소용 이 없었다.

楚有祠者 賜其舍人?酒 舍人相謂曰 數人飮之不足 一人飮之有餘 請畵地爲蛇 先成者飮酒 一人蛇先成 引酒且飮之 乃左手持 ? 右手畵蛇曰 吾能爲之足 未成一人蛇成 奪其?曰 蛇固無足 子安能爲之足 遂 飮其酒 爲蛇足者終亡其酒.

화서지몽(華胥之夢)

화서의 꿈이란 뜻으로, 좋은 꿈이나 낮잠을 이르는 말.
먼 옛날 중국 최초의 성천자(聖天子)로 알려진 황제(黃帝 : 公孫軒轅) 는 어느날, 낮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화서씨(華胥氏)의 나라에 놀러가 안락하고 평화로운 이 상향(理想鄕)을 보았다.
그 곳에는 통치자도 신분의 상하도 연장(年長)의 권위도 없고, 백성들 은 욕망도 애증(愛憎)도 이해(利害)의 관념도 없을 뿐 아니라 삶과 죽음에도 초연했다. 또 물 속에 들어가도 빠져 죽지 않고 불 속에 들어가도 타 죽지 않으며, 공중에서 잠을 자도 침대에 누워 자는 것과 같고 걸어도 땅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 또한 사물의 미추(美醜)도 마음을 동요시키지 않고 험준한 산골짜기도 보행을 어렵게 하지 않았다. 형체를 초월한 자 연 그대로의 자유로 충만한 이상향이었던 것이다.
이윽고 꿈에서 깨어난 황제는 번뜩 깨닫는 바 있어 중신들을 불러모 았다. 그리고 꿈 이야기를 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짐(朕)은 지난 석 달 동안 방안에 들어앉아 심신 수양에 전념 하며 사물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려 했으나 끝내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오. 그런데 짐 은 이번 꿈 속에서 비로소 그 도(도(道)라는 것을 터득한 듯싶소."
그 후 황제(黃帝)가 '도(道)'의 정치를 베푼 결과 천하는 잘 다스려졌 다고 한다.

華胥氏之國 在?州之西 臺州之北 不知斯齊國幾千萬里 蓋非舟車 足力之所及 神遊而已 其國 無師長 自然而已 其民無嗜欲 自然而已 不知樂生 不知惡死 故無 夭? 不知親己 不知疏物 故無愛憎 不知背逆 不知向順 故無利害 都無所愛惜 都無所畏 忌 入水不溺 入火不熱 斫撻無傷痛 指?無?? 乘空如履實 寢虛若處牀 雲霧不?其視 雷霆不亂其聽 美惡不滑其心 山谷不?其步 神行而已.

"유사어" 화서지국(華胥之國), 유화서지국(遊華胥之國)

화씨지벽(和氏之璧)

천하 명옥(天下名玉)의 이름.
전국 시대, 초(楚)나라에 변화씨(卞和氏)란 사람이 산 속에서 옥(玉)의 원석을 발견하자 곧바로 여왕에게 바쳤다. 여왕이 보석 세공인(細工人)에게 감정시켜 보니 보통 돌이라고 한다. 화가 난 여왕은 변화씨를 월형(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에 처했다. 여 왕이 죽은 뒤 변화씨는 그 옥돌을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왼쪽 발뒤꿈치를 잘리고 말았다.
무왕에 이어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변화씨는 그 옥돌을 그러안고 궁 궐 문 앞에서 사흘 낮 사흘 밤을 울었다. 문왕이 그 까닭을 묻고 옥돌을 세공인에게 맡겨 갈고 닦아 본 결과 천하에 둘도 없는 명옥이 영롱한 모습을 드러냈다. 문왕은 곧 변화씨에 게 많은 상을 내리고 그의 이름을 따서 이 명옥을 '화씨지벽'이라 명명했다.
그 후 화씨지벽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손에 들어갔으나 이를 탐내는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이 15개의 성(城)과 교환하자는 바람에 한때 양국간에는 긴장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에 연유하여 화씨지벽은 '연성지벽(連城之壁)'이라고도 불렸다.

환골탈태(換骨奪胎)

① 얼굴이 전보다 변해 아름답게 됨.
② 남의 문장의 취의를 본뜨되 그 형식을 바꿔 자작 (自作)처럼 꾸밈.
황정견(黃庭堅)은 소식(蘇軾)과 함께 북송(北宋)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박학다식(博學多識)하여 독자적(獨自的)인 세계를 만들어 냈는데, 그의 독자적인 수법을 도 가(道家)의 용어를 빌려 표현한 것이 '換骨奪胎'라는 말이다.
"황정견은 '두보(杜甫)의 시를 일컬어 영단(靈丹)한 말로 쇠를 이어서 금을 이룸과 같다.(黃庭堅稱杜甫詩 如靈丹一粒 點鐵成金)'라고 말했다."
두보의 붓에 걸리면 흔해 빠진 경치도 곧 아름다운 자연으로 변하는 데, 그것은 연금술사가 쇠에 한 알의 영단을 넣어서 황금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이 때의 '영단(靈丹)'은 '시상(詩想)'을 의미한다.
도가(道家)에서는『영단 혹은 금단(金丹)을 먹어서 보통 사람의 뼈를 선골(仙骨)로 만드는 것을 '환골(換骨)'』이라 하고, 탈태(奪胎)의 '태(胎)'도 선인(先人)의 시에 보이는 착상(着想)을 말하며, 시인의 시상(詩想)은 마치 어머니의 태내(胎內)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그 태(胎 : 着想)를 나의 것으로 삼아 자기의 시경(詩境)으로 변화시 키는 것을 탈태(奪胎)』라고 말하는 것이다.
남송(南宋)의 중[僧] 혜홍(惠洪)이 쓴《冷濟夜話》에 황산곡(黃山谷 : 庭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의 뜻은 궁진(窮盡)함이 없고 사람의 재주는 한(限)이 있다. 한이 있는 재주로써 궁진함이 없고, 뜻을 쫓는 것은 도연명이나 두보일지라도 교묘함을 얻 지 못한다. 그러나 그 뜻을 바꾸지 않고 그 말을 만드는 것, 이것을 환골법(換骨法)이라고 말하며, 그 뜻을 규모로 하여 이를 형용하는 것, 이것을 ?태법(奪胎法)이라고 말한다."

후생가외(後生可畏)

젊은 후배들은 두려워할 만하다는 뜻. 곧 젊은 후배들은 선인(先人→先生) 의 가르침을 배워 어떤 훌륭한 인물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가히 두렵다는 말.
춘추 시대의 대철학자, 사상가인 성인(聖人) 공자는 말했다.
"'젊은 후배들은 두려워할 만하다[後生可畏].' 장래에 그들이 지금의 우리를 따르지 못하리라고 어찌 알 수 있겠는가[焉知來者之不知今也]? 그러나 40세, 50세가 되어도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는다면 두려워할 바 없느니라."
"주" '후생가외'는 공자가 제자 중 학문과 덕행이 가장 뛰어난 안회 [顔回:자는 자연(子淵), B.C. 521∼490]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함.

[ㄱ], [ㄴ/ㄷ/ㅁ], [ㅂ], [ㅅ], [ㅇ], [ㅈ/ㅊ], [ㅌ/ㅍ/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