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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걸음과 시끄러운 옹알이

 

2001년 1월 1일 월요일 277일째
도윤이가 처음 맞는 해바뀜. 도윤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해가 바뀌면서 세기가 바뀐다. 2001년, 21세기.
나는 20세기 중반에 태어나 21세기를 살고, 도윤이는 20세기 끄트머리에 태어나 21세기를 산다. 오늘처럼 평화롭고 무사히 한 해를 지낼 수 있기를...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는 도윤이. 어제의 사고는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괜히 나만 그 여파가 고스란히 남아서 내내 위가 묵직한 것이 마치 체한 것 같다.
현재 도윤이는 혼자 놀 땐 가만히 앉아서 책 보기를 즐긴다. 물론 마지막엔 결국 책장을 물고 있지만 그러기 전까지는 혼자서 책장을 넘기며 무슨 소리인지를 내면서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행동한다. 몇 번 해본 행동은 습관처럼 또 하려고 하는데, RV에 붙은 선을 만지작이는 것도 그중 하나. 선을 만지는 것까지야 괜찮지만 질겅질겅 씹기도 해서 까만 테이프로 붙여서 눈에 띄지 않게 해두었더니 TV에 붙어서서는 붙여 놓은 테이프를 만지작이다 떼어지지 않자 '아-으-' 하며 우는 것처럼 고함을 친다. '왜 없지? 아니, 여기 있는데 왜 잡고 놀 수가 없지? 분명히 요기 있는데...' 하는 것 같다. 급기야는 운다. 고집이 생겨서 도와달라며 울면서 보행기를 붙잡고 기듯이 슬금슬금 내게로 걸어왔다. 얼른 다른 놀이로 끌어들이면 그 소동은 끝난다.
하여튼 이제 저도 고집을 부려 보느라 수시로 소리를 지르고, 무언가를 요구하는 울음도 울 줄 안다. 죽을 먹다가도 더이상 먹기 싫으면 입을 꼭 다물고 양손을 파닥파닥 내려친다. 고개를 훽훽 돌리면서 손사래를 칠 때 보면 참 고집스러워 보인다. 그래도 순한 편이라 심하게 떼를 쓰는 적은 없다. 졸릴 때면 내 몸을 잡고 뱅뱅 돈다. 내 어깨에다 코를 처박으며 뭐라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릴 때는 업어 달라는 신호다. 이때 업어주면 금방 잠든다.

1월 2일 화요일 278일째
도윤이에게서 차츰 개성이 나타난다. 모든 장난감 중에 책을 제일 종하고, 움직이는 장난감은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며, TV를 보다 재미있는 장면에서는 저도 크게 소리내어 웃는다. 엄마젖을 먹고 자라서 그런지 내게 몹시 달라붙는다. 그건 아마도 거의 하루종일 나와 둘이서만 지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들이 집에 오면 몹시 반기는데 그 또한 다른 아이들에게선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밖에 나가서도 아는 체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무척 즐거워한다.
TV의 본방송과 광고방송은 어쩜 그리 잘 구별하는지, 광고만 나오면 얼른 눈이 TV로 향한다. 앞을 가리면 고개를 젖혀서라도 놓치지 않고 TV를 보려든다. 목을 길게 빼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보고 있는 그 모습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1월 3일 수요일 279일째
도윤이 사진이 들어간 달력을 만드느라 작은방에 수시로 들락거렸더니 한동안 멀쩡하던 발등이 다시 시리다. 발등과 발목이 제법 많이 시리다. 보일러를 넣지 않은 작은방은 꽤 춥다. 하긴 며칠 전 보일러가 고장난 날부터 그런 것 같기도 하다.

1월 4일 목요일 280일째
가만 생각해 보면 도윤이가 밤잠을 깊이 못 자는 건 몸이 힘들어일지도 모른다. 요며칠 도윤이는 놀 때 서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식탁이든 보행기든 흔들의자든 아기침대든 아니면 엄마 몸까지도 도윤이는 잡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잡고서는 일어서서 논다. 만지고 꺼내고 잡아당기며. TV를 붙잡고 서서 단추들을 만지작거리고 쌀통에 놓여진 반찬통들을 하나씩 꺼내어 바닥에 차례로 내려놓기도 하고 싱크대 손잡이를 잡고 서서 속을 기웃거린다. 흔들의자를 힘껏 밀어서 다리가 바닥에서 떨어질 정도로 한껏 젖히며 놀기도 하고 식탁에 간신히 손을 뻗어 식탁유리를 잡거나 그 위의 물건들을 거머쥐기도 한다. 식탁 의자들을 교대로 붙잡으며 돌아다니는가 하면 보행기에는 의자 속으로 들어갈 듯이 거꾸로 머리를 처박으며 논다. 끊임없이 으갸- 음무- 챠- 으푸- 따위의 소리를 내지르면서 기운을 쓴다. 저렇게 놀자니 피곤하기도 하겠다.

1월 9일 화요일 285일째
또 눈이 온다. 많이도 온다. 이틀 전에도 폭설이 내리더니 오늘도 아침부터 큰 눈송이로 된 함박눈이 내린다. 올 겨울은 유난하다. 돌아다니며 실컷 눈을 맞아봤음 좋겠다. 낑낑 힘들이며 골목을 열심히 쓸어놓은 앞집 할머니는 몹시 약오르겠다.

1월 11일 목요일 287일째
도윤이 귀 앞에 있는 구멍이 '새열낭종'이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며칠 전부터 왼쪽 귀 앞의 구멍에서 진물 같은 것이 나는 것 같아 유심히 사폈다. 오늘은 목욕을 마치고 아이가 잠을 자기에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동그랗게 맺혀 있는 고름. 닦아냈더니 금세 맺히고, 가만 놔두니 그대로 굳어갔다.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그제서야 의사는 새열낭종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동안은 병명도 얘기해 주지 않고 그저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진물이 나거나 커지면 병원을 찾아오라고 하더니. 이 가정의원에서도, 도윤이가 태어난 병원에서도 똑같이 말했었다. 인터넷에서도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어쩌면 자라면서 없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 새열낭종은 일종의 기형이었다. 수술을 하자면 아주 큰 수술이라고 한다. 목까지 이어져 있기 때문인데 대부분은 수술하지 않고 그냥 지낸다고 한다. 평생을 그대로인 채 가끔 고름이 나면 닦아내고, 심하면 항생제를 먹으면서.
도윤이에게 무척 미안하다. 온전한 육체로 낳아 주지 못해서. 수술을 해주려 해도 어린 몸에 전신마취까지 시키며 자극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고, 그런 식으로 아이를 힘들게 해야만 온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하다. 평생 내게 남을 죄의식 1번.
이번 일이 의사의 말처럼 간단히 넘어가길 간절히 바라지만 만약 그렇지 못할 때, 나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죄책감이 가슴을 내리누른다.
또 만약 이 아이에게 이보다 더 힘든 일이 닥친다면, 과연 내가 의연할 수 있을까. 아이는 나보다 더 오래 살 테고, 나는 이 아이를 아주 오랫동안 지켜볼 텐데. 이 아이에게 조금만 힘든 일이 생겨도 나는 가슴이 아플 텐데...
부디 무사히, 건강하게 살아다오.
아픈 아이를 가진 부모의 심정을 충분히 알 것 같다. 얼마나 가슴이 터질지, 심장이 벌렁거릴지, 머릿속이 먹먹할지, 온몸이 후둘거릴지, 얼마나 죽고 싶을지...

1월 12일 금요일 288일째
도윤이는 요즘 손톱이 멀쩡할 때가 드물다. 손톱이 찢어지고, 갈라지고, 벗겨진다. 아무거나 잡고 끌어당기고 끄집어내리기 때문이다.
이젠 제법 한 손만 잡아 주어도 잘 걷는데 아직 혼자서 걸음마를 해본 적은 없다.
잘 때는 온 방안을 휩쓸고 다니며 몸부림을 친다. 자다가 무언가를 찾는 듯하다가는 쿠션이나 엄마 몸 위에 엎드리거나 드러누워서 계속 잔다.
오늘은 도윤이가 TV를 보고 있는데 너무 가까이에 있기에 TV를 껐더니 울어 버렸다. 저 하고 싶은 대로 되지 않으면 울음으로 항변하는 것. 도윤이의 자기 의사 표현 방법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옹알이도 바뀌었다. 뜨아-, 따, 쁘어-...
귤을 주면 입안에 꽉 문 채 즙을 빨아먹고, 껍데기를 물고는 좀체 뱉지 않는다. 마치 껌처럼 입안에 오래 물고 있기도 한다.

1월 13일 토요일 289일째
도윤이는 얼굴이며 사지육신이 흠 잡을 데 없이 예쁘게 잘생겼다. 9개월 반짜리 아기답게 알맞게 잘 자라고 있으며, 이는 벌써 8개로 개월수보다 빨리 나고 있다. 행동발달도 빠른 편이고, 하는 짓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완벽하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귀 앞의 구멍은. 완벽하니까, 그래서 교만해질까봐 하나님이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고, 네 몸 어디에도 한 군데쯤은 흠이 있을 수 있다고, 그러니 겸손하게 살라고 주신 건가 보다. 사실 건조한 피부 정도야 흠도 아니니까.
행동은 씩씩하지만 성품은 조용하고 순해 보이는 도윤이. 그걸 크게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인간의 육체는 저마다 다르게 생겼다. 누구는 큰 점을 지니고 있고, 누구는 쌍가마를, 누구는 젖니가 안 빠져 영구치로 평생을 쓰기도 한다. 그저 얼굴에 난 점 하나 정도로 생각해 주길 바란다.

1월 15일 월요일 292일째
아침부터 소란이었다. 기온이 영하 18.6도까지 떨어지니 보일러 급수 호스가 얼어 버린 것이다. 보일러 회사는 전화가 폭증해 30분이 넘어서야 겨우 통화가 되고, 드라이어로 녹이다가 전기 난로를 한참 틀어 놓은 뒤에야 보일러로 물이 들어갔다. 참 추운 날씨다. 15년 만에 이런 추위가 왔다나... 한강이 온통 얼고, 매일 최하 기온 경신이라고 난리다.
시댁도 수도관이 얼었단다.

1월 22일 월요일 299일째
도윤이는 씨밀락으로 바꿔 먹은 지 딱 일주일. 변을 보는 게 아주 수월하며 횟수도 2~3회로 늘었다. 응가를 하기 위해 온 얼굴이 시뻘개지는 일은 없다. 역시 바꿔 먹인 분유의 효과인 모양이다.
요즘은 행동이 매우 활발한데 깨어 있는 시간에는 한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잡고 기어다니고 장난감을 갖고 놀며 부지런히 기어다니고 책을 찢어 놓기도 한다. TV 광고만은 몹시 집중해서 보는데 집중력이 날로 좋아지는 듯하다. 제 키보다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잡기 위해 발돋움을 하면서까지 안간힘을 쓰고 제 성대로 안되면 칭얼대기도 한다. 웃음은 이제 분명한 이유가 있을 때만 웃는 것처럼 보인다. 엄마나 다른 어른들과 마주보며 웃기도 하고, 장난을 치면 아주 좋아한다. 몸뚱이는 제법 단단해져서 발가벗겨 놓으면 참 예쁘다. 얼굴 선도 또렷해서 조각 같은 외모다. 여전히 잘 웃고, 칭얼대다가도 젖병을 보면 웃으며 기어온다. 업히기를 좋아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엄마 등뒤에 달라붙어 서 있곤 한다.
옹알이는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어제는 종일 '빠빠빠빠...' 하며 돌아다니더니 오늘은 '따따따' '뜨아뜨아뜨아' '나아나아나아'... 참 재미있다. 새로운 것을 보면 그걸 잡고서 한참 뭐라 중얼댄다. 특히 엄마, 아빠 옷에 붙은 지퍼 손잡이나 잠바 끈 등.

1월 23일 화요일 300일째
남편은 아침부터 몹시 분주했다. 밥을 하고, 미역국을 끓이고, 잡채를 만들었다. 내 생일이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어 나름대로 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한 밥상. 물론 잡채는 내 조언이 필요했다. 허나 어떠랴, 그 성의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내 생일,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 처음 맞는 생일. 어쩐지 그리 큰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착하고 다정한 남편이 손수 차린 밥상은 매우 고마웠다. 오후엔 인도요리점에 가서 식사했다. 비싼 값만큼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인도의 분위기는 풍부했다. 그것만으로도 좋다.

1월 31일 수요일 308일째
설을 보내고 대구에서 5일, 울산에서 2일을 보내고 어젯밤에 서울에 왔다. 대구에서부터 사촌 형 셋과 함께 지낸 도윤이는 형들과 노는 걸 무척 좋아했다. 덕분에 나는 많이 편했다. 둘째 태형이는 도윤이 옆에서 까악- 소리 지르기를 즐겼다. 시끄럽고 날카로운 소리를 몹시 싫어하는 도윤이가 그때마다 울어대니까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일주일 동안 도윤이는 아마 1년치를 몰아서 다 운 것 같다. 그래도 아이들이 좋은지 어제 서울로 오는 5시간의 기차여행에서도 뒷좌석에 앉은 초등학생 둘과 놀고 싶어서 무려 3시간이나 깨어서 기웃거리고 기어가고 하는 통에 나는 지금까지도 상당히 피곤하다. 역시 주변에 친구들이 있어야겠다.
1월 26일에 한 발짝 걸음을 떼고는 저도 깜짝 놀라 얼른 내 품으로 달려들던 도윤이는 3일 뒤인 1월 29일(306일째) 울산에서 세 발짝을 뗐다.
젖을 완전히 끊은 지 20일, 내 몸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다. 산모의 몸에서 여자의 몸으로. 물론 흐트러진 몸매는 아직 여전하다. 이제 다이어트도 하고 운동도 해야 할 텐데 걱정이다. 나는 끈기가 몹시 부족하니까. 그래도 엄마가 됐으니 좀 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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