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열한 거리


 

이스트 엔드 시(市)는 무엇의 동쪽 끝인지는 몰라도, 꽤 큰 도시였고, 동시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추잡한 것들을 감추고 있는 슬럼 지대였다. 여자, 남자 할 것없이 더러운 옷차림을 한 사람들로 거리는 들끓었고 깨끗한 칼라가 달린 하얀 셔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시민들의 눈가는 멍 투성이였고 아무도 머리를 빗고 다니지 않았다. 이스트 엔드는 실업자 세상이었다. 이 실업자들은 특유의 싸구려 파이프를 들고 다니며 비누 곁에는 다가가지도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밤낮으로 하이드 파크로 몰려왔고, 인근 경찰서들은 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술주정뱅이들로 골치를 썩였다.

 

빅토리아시대의 잉글랜드에 있는 런던의 이스트 엔드는 경제적, 사회적인 이유로 다른 도시에서 발붙이지 못한 사람들의 집이었다. 대략 구십만명 정도가 이 슬럼지역에서 살고 있었는데, 화이트채플의 거리엔 근처의 도축장으로 향하는 소떼나 양떼들의 긴 줄이 늘어서 있었고, 도축장에서는 공포와 고통으로 인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피와 배설물이 길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고 쓰레기와 하수구에서 나는 악취는 이 도시만의 독특한 냄새를 만들었다. (아서 모리슨, 비열한 거리의 이야기)

 

주민들 대개는 빈민가 아파트에서 비참하게 살았다. 곳곳이 썩어 문드러진 그곳 아파트에선 한 집에 한 두 살림이 같이 부대꼈다. 한 보건위생국 관리의 보고서에는, 아버지, 어머니, 세 아이들 그리고 네 마리의 돼지(!)가 함께 다락방에 살고 있었다고 쓰여있다. 한편, 남편은 천연두에 걸려 자리에 누워있고 아내는 막 여덟 번째 출산을 마친 상태였으며 아이들은 반쯤 벌거벗은 채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곳도 있었다고 전한다. 일곱명의 사람들이 지하 부엌에서 살고 있는 곳엔 한 어린애가 죽은 채로 같은 방에 누워있었다고 한다. 한 딱한 과부는 세 자녀와 십 삼일 전에 죽은 어린아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침대라고 하는 것들은 지푸라기나 더러운 헝겊 조각들을 모아 놓은 것이었고 그나마도 없는 사람들은 지저분한 판자 위에 몸을 눕혀야 했다. (앤드루 먼즈, 버려진 자들의 고통스러운 외침)

 

이스트엔드에 사는 사람들은 저임금 노동자, 임시직 노동자, 실업자가 태반이었고 이도저도 아니면 범죄자였다. 부모들은 하루하루 연명하는데 급급했고, 태어난 아이들의 반 이상은 다섯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죽어나갔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아이들 중 많은 수는 정신적, 혹은 육체적 장애아였다.

독신여성이나 과부들은 생계를 유지하려고 몸을 팔았다. 경찰은 1888년 조사 결과, 화이트채플만 해도 약 1천 2백명의 매춘부들이 있는 것으로 집계했으며 이 숫자는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끔은' 몸을 팔아야 했던 여성들을 제외한 숫자다.

9천명에 달하는 거리의 사람들을 재워주는 화이트채플의 하숙집은 대략 2백개가 넘었다. 침실은 침대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기다란 방으로, 구더기와 해충이 우글거렸다. 여자들은 당일 숙박비를 벌지 못했을 경우 몸을 주는 대가로 같이 보낼 남자를 찾아다녔고, 그나마도 실패하면 길바닥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1880년 러시아 학살 사건과 프러시아의 폴란드인 추방으로 동부유럽에서 런던으로의 이민의 흐름은 급격히 거세어졌다. 많은 수는 유태인이었으며 싼 전세값 때문에 화이트채플에 정착하게 되었다. 유태인들의 정착은 위생환경개선과 지역안전증대라는 긍정적 효과를 일으켰다.

그러나, 유태인 거주자들의 다각적 도시개발과 환경조건의 개선에도 불구하고 화이트채플은 여전히 가난과 범죄로 유명한 도시였다. 어둡고 비좁은 골목들이 즐비한 더러운 슬럼가에서, 화이트채플의 살인자는 범죄를 위한 최적의 장소를 찾아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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