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시카고에 사는 아일랜드계 주민과 존 웨인 게이시 Sr. 부부가 기념일로 삼은 날이 있다. 그날은 성 패트릭 데이로, 매리온 일레인 로빈슨 게이시와 존 웨인 게이시 시니어 부부가 1942년 그들의 첫 아들을 에지워터 병원에서 맞이한 날이었다. 존 웨인 게이시 주니어는 세 자녀 중 둘째였다. 누나 조앤은 두 살 위였고, 또 2년 후엔 막내 캐런이 태어났다. 세 아이들 모두 카톨릭 신자로 자라났고 그들이 살던 시카고 북부에 위치한 카톨릭 학교에 다녔다. 게이시가 자라난 곳은 중산층 가정이 많이 살던 곳이었고, 따라서 아이들이 방과 후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게이시도 예외는 아니어서 항상 아르바이트와 보이스카우트 일로 바쁜 생활을 보냈다. 그는 신문 배달 또는 상점 점원, 물건 배달원등으로 일했다. 특별히 인기가 많은 아이는 아니었지만 게이시는 선생님들과 동료 직원들이 좋아할 만한 성격이었으며 학교와 보이스카웃에도 친구들을 많이 두었다. 그는 항상 친구들과 활발하게 어울렸고,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보이스카웃 활동에 흠뻑 빠져 지냈다.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일어난 몇몇 사건들이 그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 점을 빼면, 그는 아주 정상적인 유년시절을 보내고 있는 셈이었다. 게이시가 11살이 되었을 때, 게이시는 그네놀이를 하다가 그네에 머리를 부딪힌다. 이 사고로 그는 뇌에 혈전이 생겼다. 그러나 16살이 되기 전까지 이 혈전은 발견되지 않았다. 11살부터 16살이 될 때 까지 그는 혈전 때문에 몇 번 쓰러졌고, 뇌신경차단조직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서야 그런 증상은 없어졌다. 17살 때 게이시는 원인 모를 심장질환을 겪는다. 그는 일생에 걸쳐 이 질환 때문에 몇 번 입원을 해야 했지만 의사들은 그가 겪는 이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주 심장이 아프다고 불평을 해댔음에도 불구하고(특히 체포되고 나서 더욱) 그는 한번도 심각한 심장 발작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십대 후반기에 있었던 아버지와의 잦은 불화로 괴로워한 그였지만, 어머니와 손위아래 자매들과의 관계는 견고했다. 그의 아버지는 가학적 알콜중독자였고, 아내를 물리적으로 학대하는 동시에 아이들에겐 언어폭력을 일삼았다. 아버지는 인간적으로 그리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었지만, 어린 게이시는 아버지를 마음 속 깊이 사랑했으며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끌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불행하게도 그는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그토록 바라던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없었으며, 그 점은 그가 평생을 두고 후회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자 게이시는 네 개의 학교를 전전하다가 결국 졸업을 못한 채 학교를 중퇴한 후 라스베거스로 길을 떠난다. 그는 몇몇 장의사의 뒤치닥거리를 하며 온갖 이상한 일을 해보게 되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 힘든 상황에서, 게이시에겐 라스베거스에서의 생활이 불행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장도 못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일감이라야 손에 꼽을 정도여서, 그는 무척 어려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누나와 동생, 그리고 어머니가 손꼽아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필요한 차비만 버는데도 그에겐 꼬박 석 달이 걸렸다. 1960년대 초반 라스베거스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는 즉시 상경대학에 진학하여 결국 졸업했다. 대학 재학 당시, 그는 영업사원으로의 천부적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게이시는 거의 타고난 영업사원이었고, 그의 말이라면 어떤 물건이라도 팔아치울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그의 재능을 시험해 볼 장소로 넌부쉬(Nunn-Bush) 신발회사를 택했고, 그것이 말하자면 첫 직장이었다. 그는 회사 경영 훈련 감독으로서의 역할을 누구보다도 훌륭히 해냈고, 얼마 있지 않아 직장을 옮겨 일리노이의 스프링필드에 위치한 한 남성복 할인매장을 맡게 되었다. 게이시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는 엄청나게 살이 쪘고, 그것이 심장에 대한 무리가 되어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심장 때문에 입원한지 얼마 안되어 그는 척추손상으로 다시 입원하게 되었다. 몸무게와 심장, 척추질환은 이후 일생동안 게이시를 괴롭혔지만 그는 결코 일이나 다른 부수적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스프링필드에서 일하고 있을 때, 게이시는 지역사회를 위한 몇몇 봉사단체와 인연을 맺게 된다. 치로 클럽(Chi Rho Club)에선 회장을, 카톨릭 인터 클럽(Inter-Club) 위원회에서는 이사를, 일리노이 시민을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는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었으며, 홀리 네임(Holy Name)협회에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한 결과 첫 부회장이 되었으며 '올해의 인물'로도 뽑히게 된다. 게이시가 이런 민간단체에 깊이 연관되어 있고, 대부분의 자유시간을 그곳에 바쳤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당시 사람들은 그를 매우 열성적이고 지역사회에 이바지하기 위해 열심인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일을 하도 열심히 해서 한번은 신경쇠약으로 입원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질병 따위로 인해 자신의 삶이나 행복이 지장을 받도록 내버려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1964년 9월, 게이시는 워털루, 아이오와 지역에 있는 다수의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매장을 관리하고 있는 마이어스란 사람의 딸인 동시에 직장동료였던 매릴린 마이어스와 만나 결혼했다. 게이시의 장인은 자신이 갖고 있던 체인점 중 하나를 사위에게 내주었다. 이후 게이시 부부는 아이오와로 옮겨온다. 마치, 그 당시 인생은 게이시에게 많은 행복을 약속하는 듯했다. 게이시는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여 장인을 도와 일하기 시작했다. 평균 하루 12시간을 일에 매달렸으나 14시간, 심지어 그 이상을 투자하는 것은 그에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체인점 모두를 물려받을 것이라는 희망하에 몸을 바쳐 일을 배웠다. 일하지 않을 때는 그는 워털루, 아이오와, 제이시즈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게이시는 제이시즈를 통해 지역사회를 위한 자원봉사에 지치지도 않고 매달렸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곳에 있었으며 그 또한 남는 시간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클리포드 L. 라인데커의 책 "소년들을 살해한 남자"를 보면 제이시즈의 자원봉사자 중 그를 잘 알았던 찰리 힐이란 남자의 말이 인용되고 있다. "그는 성공하길 원했으며 동료들에게서도 주목을 받길 원했지요. 게이시는 항상 무슨 일인가에 열심이었고 제이시즈에 헌신적이었습니다. 그 모임은 그에게는 인생 전체를 걸 만한 것이었죠." 장인의 가게에서 일하지 않을 때, 또는 자원봉사를 하지 않을 땐 게이시는 아내와 종종 시간을 보내곤 했다. 매릴린은 아이오와에 온 지 얼마 안되어 아들을 낳았고, 이어 곧 딸을 낳게 되었다. 게이시 가족은 아이오와에서의 몇 년 간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세월을 보냈다. 교외에 위치한 집은 그럴 듯 했고, 가족들은 사랑스럽고 건강했다. 매릴린은 아이들 돌보기를 좋아했고, 게이시도 직장과 제이시즈의 일에 뿌듯해 했다. 그는 심지어 제이시즈의 회장에 오르기 위한 선거운동에도 몸담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완벽해 꿈인 듯 했으나, 실제로 그들은 행복했던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