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금호 문화

 

임철우님 글(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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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기행

비극의 역사, 그리움의 노래

글 임철우(소설가, 한신대 교수)

몇 해 전 문학 심포지움 참석차 유럽에 갔을 때, 한 독일 작가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유럽 여러나라 중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뜻밖에 아일랜드라고 대답했다. 으레 스위스나 이태리, 스페인, 스칸디나비아 쯤으로 예상했던 나는 좀 놀랐다. 그의 대답인즉슨, 전 유럽에서 아직도 자연이 별로 훼손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아일랜드라는 거였다.

이 나라를 여행하면서 나는 새삼 그 말을 실감했다. 유럽에서 가장 낮은 인구밀도. 남한보다 약간 작은 국토에 인구는 겨우 오백만 남짓. 산업화의 발톱이 아직 미치지 않아, 국토가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된 나라.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그 특유의 비극적인 역사와 함께 무수한 유물들이 고스란히 존재하는 나라. 비록 그 때문에 유럽 공동체 중 가장 낙후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덕분에 자연을 아끼는 사람들이 가장 선망하는 나라 중 하나로서 관광객들이 급격히 몰리는 대상이 된 셈이다.

실제로 아일랜드의 자연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고등학교 때던가. 데이빗 린 감독의 <라이안의 딸>이라는 영화가 기억난다. 점령군인 영국군 장교와 아일랜드 처녀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70밀리 대형 화면에 비치는 해안 풍경은 압권이었다. 그러고보니, 아마도 아일랜드에 대한 내 막연한 애정은 그 영화의 기억에도 상당 부분 빚진 게 아닌가 싶다.

더블린에서 사흘을 지낸 뒤 나는 지도를 펴놓고 궁리했다. 짧은 일정에 모두를 돌아볼 수는 없는 법. 가장 핵심적인 곳부터 훑기로 하고, 맨 먼저 손가락을 짚은 곳이 서쪽 해안 지방이었다. 광대한 대서양과 접한 유럽의 극단인 서부지역 해안선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명소로 이름이 난 터. 예의 그 영화의 무대가 된 것도 바로 거기였다.

7월 10일 오후 1시 25분. 코널리 역에서 슬리고(Sligo)행 열차에 올랐다. 시인 예이츠(W.B.Yeats)의 영혼의 고향이자 묘지가 있는 그곳으로부터 시작, 남으로 해안선을 따라 내려오기로 했다. 슬리고까지는 약 세 시간의 여정. 열차 좌석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고 아무나 먼저 타서 앉으면 된다. 절반 쯤 찬 열차 내부는 꽤 깨끗하고, 테이블을 중심으로 양쪽에 2인용 좌석을 배치했다. 넉넉한 테이블 위에 책을 펼쳐놓고 읽기가 안성마춤인데, 이런 게 우리나라에도 있으면 오죽 좋을까, 무척 부러웠다.

 

핏물처럼 배어있는 불행의 역사

열차는 중부 내륙지대를 통과,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단선이라 교행을 위해 이따금씩 멈췄다가 가곤 하는데, 드넓은 평지에 간간이 마주치는 간이역들이 퍽이나 귀엽고 정겨웁다.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계속 이어지는 드넓은 초지에는 양떼며 말, 특히 제주도 조랑말과 아주 흡사한 작은 말들이 인상적이다. 또 수많은 호수들이 번갈아 나타나는데, 그 중엔 끝이 아득할 정도로 넓은 호수도 적지 않다. 

슬리고까지 내내 이어지는 푸르른 들판은 어째선지 경작지는 거의 없고 대부분 버려진 땅처럼 보였다. 이렇듯 드넓은 땅을 왜 그냥 놀리고 있을까 싶었는데, 알고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일랜드는 편서풍 영향을 받는 해양성 기후라는 점에선 영국과 아주 흡사하고 지형도 평평하지만, 전 국토가 산성이 강한 토양이라서 농사에는 부적합하다. 목축업이 특별히 발달한 이유도 거기에 있으리라.

그러나 한없이 평화롭게만 보이는 아일랜드의 들판엔 참으로 아픈 대기아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참상으로 기록될 1845~1851년 사이의 대기아. 불과 오륙년 사이에 대략 백만명 이상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하고, 백만 명 이상이 조국을 버리고 이민의 길을 떠나야 했던 미증유의 참사였다. 이 참극에는 당시 제국주의 영국의 비정한 식민지정책 역시 한몫을 톡톡히 거들었다는 점에서 또다른 분노를 안겨준다.

17세기까지만 해도 밀과 귀리를 먹고 살았던 아일랜드인들은 때마침 미국과 스페인에서 들어온 감자가 널리 퍼지면서, ‘아이리쉬 포테이토’라고 불릴 만큼 감자가 주식으로 등장한다. 대대로 허기져 왔던 아일랜드인들은 풍요로운 감자 농사와 때 맞추어 인구가 급격히 증가, 1800~1840년 사이에 4백만에서 8백만이라는 실로 기하급수적인 증가율을 기록한다. 이 엄청나게 불어난 인구는 거의 대부분 절대 빈곤층으로, 감자만으로 연명해야 하는 이들의 수는 1845년 무렵 전체 인구의 삼분지 일. 그런데 때마침 새로운 곰팡이병이 전국의 감자밭을 휩쓸게 되고, 이후 오륙년 동안 참담한 대흉작이 계속 이어졌다.

엄청난 숫자가 굶주림 끝에 죽어가고, 죽음을 피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떠났다. 대기아의 재앙과 함께 티푸스, 이질, 괴혈병 등이 창궐하여 죽음의 그림자는 전 국토를 휩쓸고 있었지만, 정작 식민통치국인 영국은 경비 부담을 거부, 문제 해결은커녕 담 너머 일처럼 손을 놓고 방관하고만 있었다. 지구상 가장 부강한 나라임에도 오직 자국의 경제적 잇속만을 위해 속국인 아일랜드인들을 그대로 굶어죽도록 내버려둔 것이다. 차라리 특정 종족을 멸절시키려는 정책이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을 이 엄청난 죄악은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부끄럽고 치욕스런 기록의 하나로 남을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 기간 동안 밀 등의 곡식은 대단한 풍작을 기록했으나 너무 비싼 까닭에 빈민층으로서는 그림의 떡이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렇듯 수백 만이 굶어 죽어가는 동안에도 아일랜드 항구에선 곡물이 계속 수출되고 있었다니, 영국의 비인도적인 작태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아일랜드 농지를 거의 대부분 소유하고 있던 영국인 지주들은 그저 본국의 안락한 집안에 누워서 소작인들이 당하고 있는 참상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이 대기아의 결과, 사망자는 백만 명 이상이었고, 이로부터 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조국을 버리고 이민을 떠났다. 당시 팔백 만이던 인구가 백 오십 년이 지난 현재 오백 만 정도이니, 그 때 줄어든 인구를 아직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민들 대부분은 미국으로 건너가, 말 못할 고생과 천대 속에 미국사회의 하층민으로 살아가야 했다. 미국사회의 아일랜드인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과 천대의식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1930년대까지 미국에 이주한 아일랜드인은 도합 4백만. 그러나 단결력 강한 민족성을 토대로 이들은 점차 미국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 마침내 최초의 가톨릭신자이자 아일랜드계 대통령인 존 F. 케네디를 탄생시키게 되는데, 이는 미국내 아일랜드 이민들의 승리이자 본국과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는 아일랜드인들에게 굉장한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된다. 현재 미국의 대통령인 클린턴 역시 바로 아일랜드 이민의 후손이다. 굶주림을 피해 조국을 버려야 했던 미국 아일랜드 이민들의 애국심은 대단했다. 그 말 못할 어려움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금을 모으고 무기를 공급하는 등 단합된 노력으로 계속적인 지원을 벌여, 마침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한 것도 그들이었다. 

평화롭고 한가롭기만한 풍경 어디에나 핏물처럼 짙게 배어 있을 불행한 이 나라의 역사를 떠올리고 있자니, 불현듯 바로 이 순간에도 굶주림에 고통받고 있을 내 민족, 북한의 기아사태가 눈 앞을 자꾸만 가로 막았다. 그건 과거가 아닌, 바로 오늘 우리들의 문제인 거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가슴이 한없이 무겁고 답답하기만 했다.

옆 자리의 두 금발머리 아가씨들에게 얘기를 건넸다. 미국 알라바마 대학생인 그녀들은 문학을 전공하는데, 예이츠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슬리고로 가는 중이란다. 마침 관심사가 비슷해서 아일랜드 문학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창밖으로는 나무도 없이 바위투성이의 헐벗은 구릉들이 지나간다. 스코틀랜드 북부와 대단히 흡사한 풍경 사이로, 영락없이 제주도의 오름들을 닮은 둥글고 펑퍼짐한 산들도 보인다.

 

슬픔 그리움 사랑의 노래, 아이리쉬 펍

슬리고에 도착하자 벌써 날이 기울었다. 예이츠의 무덤이 있는 드럼클리프 사원으로 가는 버스는 한 시간 후. 하지만 을씨년스레 밤중에 찾아갈 수는 없었으므로, 다음날로 미루고 일단 가까운 비앤비에 방을 얻었다. 술이 덜깬 50대 주인남자가 나를 보더니 대뜸 “사요나라, 굳바이" 하고 반긴다.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아, 이 근처에 한국회사가 있어서 한국을 잘 안다" 라고 웃는다. 알고보니, 한국의 한 컴퓨터 업체의 공장이 있다고 한다. 싸구려 침대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소박한 방에 짐을 내려놓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슬리고는 의외로 작고 한적한 소읍으로, 오래된 집들과 구불구불한 도로들이 해묵은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다리 부근 은행 정문 앞의 예이츠의 동상을 찾았다. 얼굴은 시인을 닮았고, 몸통 다리는 모딜리아니의 그림처럼 기이하게 늘어진 형상이다. 바로 근처에 <예이츠 기념관>이 있고, 그 앞을 흐르는 작은 강은 가까운 바다로 이어지는데, 이끼 때문에 검게 비치는 맑은 강물 위로는 야생 백조 몇 마리가 한가로이 떠있다. 예이츠는 더블린 태생이지만, 선조 대대로 이곳 슬리고에서 목사로 봉직했던 까닭에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주로 보냈다. 슬리고의 해묵은 거리와 집들, 쓸쓸한 항구, 가파른 들판과 헐벗은 산들은 이후 평생동안 시인에겐 영혼의 고향이 되었고, 결국은 이곳에 묻혀서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저녁을 대충 때운 뒤, 혼자 아이리쉬 펍을 찾았다. 이 나라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선술집들이 그렇지만, 특히 이즈음은 휴가철이라서 어디나 관광객들로 붐비고, 안에서는 신나는 아일랜드 민속음악이 흘러나온다. 사실 이곳 아일랜드 선술집만큼 독특하고 매력적인 술집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듯하다. 대도시에서부터 한적한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이 펍은 예외없이 비슷한 구조와 실내장식을 갖추고 있고, 많게는 삼사백 년에서부터 최소한 몇 십 년 이상 씩의 역사를 갖고 있다. 좁고 낮은 실내, 해묵은 목재로 된 벽과 천장, 한쪽엔 길다란 바텐더 테이블, 그리고 손님용 작은 테이블 몇 개와 겨우 엉덩이만 붙일 수 있는 조그만 의자들이 있지만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서서 술을 마신다. 

흐릿한 불빛과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한 손에 술잔을 든 채 여기저기 모여서 혹은 서성대면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어 대는 풍경. 얼핏 대단히 혼란스럽고 무질서해 보이지만, 일단 그 속에 묻히고나면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술집이라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된다. 그들이 마시는 술은 대부분 맥주. 그중에서도 아일랜드의 상징과도 같은 흑맥주가 주종을 이룬다. 볶아서 태운 보리로 만들어 독특한 검은 색깔과 맛을 내는 아일랜드 흑맥주는 기네스(Guinness) 회사 제품이 그 원조이자 세계적으로 가장 명성이 높다. 일반 맥주에 비해 알코올 함량이 훨씬 높은 흑맥주는 특유의 거품맛이 일품인데, 처음엔 꽤나 씁쓸하던 그 맛에 얼마 후면 금방 반하게 된다. 내 주량으로는, 보통 것보다 갑절은 큰 유리잔을 두 잔 쯤 비우고 나면 어느 새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여행객의 외로움과 긴장감 탓인지, 나는 이번 여행 내내 거의 매일같이 펍을 찾아 흑맥주에 탐닉했다. 아마도 여행 경비의 상당량을 술값에 바쳤을 성싶은데, 어쨌거나 나는 흑맥주도 그러려니와 무엇보다 아일랜드 선술집의 분위기와 멋에 흠뻑 빠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뭐니해도, 아이리쉬 펍의 최고 매력은 바로 민속음악에 있다. 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아일랜드 민속음악은 그 지리적 조건 만큼이나 독특한 배경을 갖고 있다. 과거 직업음악가인 음유시인(minstrel)의 본거지였다는 이 나라는 그들에 의해 이어져온 전통의 맥이 아직도 남아 있다. 때문에 아일랜드 민요에는 대단히 오랜 고풍의 형태가 전승되어왔고, 풍부한 정감과 다채로운 선율이 특징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일랜드 민요만 해도, <아 목동아> <메기의 추억> <초저녁 별> <한 떨기 장미꽃> 등이 있다. 그래선가, 아일랜드인은 탁월한 음악적 감성을 지닌 민족으로도 유명하다. 

펍에서는 으레 저녁마다 흥겨운 민속음악무대가 벌어지는데, 펍 한쪽에 간단한 음향시설만 설치한 채 대부분 두 명의 악사가 연주와 노래를 겸한다. 주로 등장하는 악기는 기타, 바이얼린, 그리고 때로는 아일랜드 민속악기인 작은북이나 독특한 하프도 있다. 악사들은 대개 일정한 업소에 전속된 경우는 없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연주를 해 주고 돈을 받는 유랑악사들이다. 아일랜드의 음악은 아주 빠르고 경쾌한 곡들이 있는가 하면, 서정성이 풍부한 느리고 애조 띤 발라드가 주로 많은 편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이나 음울하면서도 서글픈 그림자가 깃들어 있어서, 어딘지 우리 민족의 정서와 유사한 부분이 많은 것 같다. 

두 번의 여행 내내 찾아가본 수많은 아이리쉬 펍은 예외없이 그렇게 언제나 흥겹고 떠들썩하고 활기에 넘쳤다. 고통과 고난으로 얼룩진 슬픈 역사, 아름답지만 생활조건으로서는 한없이 불리한 풍토 속에서 그런 풍부하고 감성적인 음악이 어떻게 오래도록 꽃 피워질 수 있었는지, 얼핏 의아했다. 아일랜드인에게 있어서 음악은 무엇이었을까. 오랜 식민지의 역사, 가난과 굴종의 삶, 힘겨운 노동과 암울한 미래, 굶주림. 그 속에서 그들은 노래를 불렀으리라. 슬픔의 노래, 그리움과 사랑의 노래, 그것들이 그들에게 먼 천국의 나라를 꿈꾸게 하고, 척박한 현실을 견디도록 만들고, 살아있는 날들을 따스하게 껴안도록 위안을 주었으리라.

 

유럽의 마지막 원시의 땅

다음날 슬리고 근처의 로우 길(Lough Gill) 호수를 찾았다. 대단히 넓은 호수 한 가운데에 있는 이니스프리 섬, 바로 예전 우리 중학교 국어책에 인용된 예이츠의 시 “이니스프리의 호도”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아마 기억하리라. 

<나 이제 일어나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외 엮어 진흙 바른 오막집 짓고 / 아홉 이랑 콩을 심고, 꿀벌통 하나 두고, 벌들 잉잉대는 숲속에 홀로 살으리…> 

그러나 호수를 건너 찾아간 그 섬은 너무나 작고 볼품이 없었다. 사람이 살 수 있기는커녕 전혀 그러고 싶은 유혹조차 안겨주지 않을 만큼 그것은 밋밋하고 평범했다. 시 속의 섬을 생각하고 찾은 이들에겐 실망이 이만저만 하지 않을 터. 하지만 나는 곧 생각을 수정했다. 시인이 꿈꾸던 그 섬이 어찌 현실의 저 볼품없는 곳이랴. 꿈의 섬. 그리움의 섬. 누구나 하나씩은 가슴에 품고 한 생을 살아가는, 그러나 결코 한번도 영영 발 내딛을 수 없는 섬, 바로 그 섬을 예이츠는 노래하지 않았으랴. 아니, 저보다 더 볼품없는 섬인들 또 어떠랴?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어딘들 그곳이 낙원이 아니랴. 그리움의 고향이 아니랴.

슬리고를 떠나, 본격적인 서부해안 여행에 나섰다. 맨 처음 도착한 곳이 저 유명한 골웨이 (Galway).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적보존지이기도 한 골웨이는 아일랜드에서도 가장 유명한 관광도시이자 예술의 도시이다. 때마침 축제가 열리는 참이어서 볼거리는 많았으나, 숙소를 찾는 데 거의 죽을 고생을 했다. 차라리 축제를 피해서 멀리 벗어나기로 하고, 다시 배낭을 꾸렸다. 골웨이 만을 거쳐서, 유명한 콘네마라 반도, 딩글반도, 링 오브 케리(Ring of Kerry)에 이르는 서부해안 지역의 풍경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수억만 년 동안 대서양의 거친 파도와 해풍에 씻기고 깎여 어디에나 거대한 암벽과 기암절벽이 숨을 막히게 하고, 그 사이사이로 한없이 부드러운 모래밭이며 평화로운 해변이 들어앉아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탄복하게 만든 것은, 그 어느 풍경이건 전혀 사람의 손에 훼손되지 않은 채 자연 그대로의 완벽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왜 아일랜드를 유럽의 마지막 원시의 땅이라고 하는지, 문명의 삶에 찌든 유럽인들이 왜 그리 이곳을 동경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서부해안을 돌아본 뒤, 아란제도의 세 개의 섬을 찾아갔다. 그야말로 원시의 삶과 자연, 선사인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 아란섬에서의 일주일을 나는 특히 잊을 수가 없다. 대략 한달 반에 걸친 두 차례의 여행으로 아일랜드의 면모를 어찌 거죽만이나마 제대로 더듬을 수 있으랴. 지면 형편상 짙은 아쉬움을 남긴 채 이 난삽한 기행문을 접는다.

원주소:http://www.kumhoculture.co.kr/magazine/1999_1/1_78.htm

 

참고사항: 

기본적으로 그림과 사진을 제외한 저자의 원문과 형식을 그대로 수록하려 노력했습니다.  가능한 몇 가지 오자를 수정하고 영어 철자를 바로 잡았습니다.  영문 지명의 경우 Lonely Planet 사의 Travel Survival Kit 시리즈 중 Ireland 편 1996년 판(2nd edition)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현지 발음은 저자의 원문을 그대로 두었습니다.   천리안을 제외한 각 원문의 위치는 글 마지막에 인터넷 주소를 링크해 부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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