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 여자 중학교

 

정상률님 아일랜드 영어 연수 탐방기(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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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구 여자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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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도수 (아일랜드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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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성호 (아일랜드 부분 발췌) 

8. 아일랜드 여행사진 모음 링크 
1) 정연희 

9. 아일랜드 영어학교 유학일기 링크
1) 오경아 

10. 아일랜드 여행기
1) 이창범 


헐리웃 영화와 맥도널드 햄버거, Kentucky Fried Chicken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네 사고 방식으로 아일랜드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거기에 James Joyce, Oscar Wilde, George Bernard Shaw, William Butler Yeats같은 아일랜드 출신(Yeats를 제외하면 대부분 더블린 출신)의 위대한 문학가들의 작품세계에 대한 무지는 더욱 더 아일랜드 및 더블린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하고 그곳에 대한 글을 쓰는 나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이 글은 나의 영어 연수 탐방기이자 내가보고 느낀 더블린(아일랜드 전체라기 보다)과 그곳사람들에 대한 기록임을 전제하며 쓰려고 한다. 

1. Ireland와 Irish people에 대한 단편적 생각들..
나는 그곳에서 많은 Irish people을 만났고 그 사람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아일랜드에 대한 인상을 물어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Great!, 혹은 Lovely!등의 짧은 대답만으론 아쉬운데 가 있었다. 
이제 그들이 다시 나에게 아일랜드에 대한 첫 인상을 물어온다면 나는 그들에게 "GREEN Country"라고 대답하겠다. 아일랜드에서 처음 보게되는 것은 넓고 푸른 잔디밭이다. 잔디는 어디를 가나 최상의 모습으로 방문객을 반겨주고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는 흙을 밟아볼 수가 없다. 즉 땅은 잔디가 아니면 아스팔트다. 
아일랜드에서 미국적인 entertainment를 기대한다면 그 사람은 실망할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더블린을 Joyce같은 작가들이 그들의 작품에서 쓴 것처럼 "음울하고 음산하며 비통한 곳"으로 생각한다면 그것도 오산이다. 나도 더블린을 그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더블린은 매우 활기차고 생기 넘치는 곳이며 그곳의 사람들은 건전하고 친절하다. 항상 웃음이 넘치고 노래를 즐긴다. 
그들의 밝고 활기차며 낙천적인 모습에서 오랫동안 외침에 시달리며 민족주의의 싹을 키워왔던 비장한 모습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바이킹과 노르만 족의 침략을 받았고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에서 살아오다가 독립국가를 이루었으나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영국에 대한 적대감은 그다지 큰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Diana의 갑작스런 죽음을 바라보는 아일랜드인 들의 슬픔에 잠긴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물론 그녀의 죽음을 영국왕실의 잘못에서 비롯된 (더욱 정확히 말하면 찰스 황태자의 바람기에 의해 비극적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던 다이애나의) 희생으로 보는 동정 어린 시각도 있겠지만 그들의 그녀에 대한 애도는 나의 예상 밖이었다. 아일랜드에도 오코넬이나 파넬같은 독립투사들이 있었지만 우리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독립투사의 희생을 감내했던 것같이 격렬히 싸운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고 바이킹이나 노르만 족의 침입당시에도 싸움보다는 동화(同化)를 꾀했던 것 같다. 
그들은 대체로 경직되지 않았고 유연했으며 급하지도 않았고 여유가 있어 보였으며 밤늦게 거리를 다녀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로 거리는 안전했다. 한 달의 기간으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조직 폭력배나 강도 같은 강력범죄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듯했다. 
작년 미국여행당시 미국이 참으로 축복 받은 나라이며 삶의 질이 높다는 생각에 부러움과 동시에 우리의 갑갑한 서울을 생각하며 속상해 하면서도 왠지 같이 살 수는 없을 것 같은(이민을 한다면) 소외감 같은 것을 느꼈는데 이번 연수 후에 나의 느낌으론 이들은 같이 어울려서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2. Homestay 
Homestay야 말로 아일랜드 어학연수의 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아일랜드에 도착한 첫날 설레는 마음으로 만난 나의 Host Family는 2남 1녀의 자녀를 모두 출가시킨 60대의 노부부였다. 우리는 대학에서 각자의 host family를 맞았고 그들은 모두 승용차로 우리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내가 묵게될 집은 대학(UCD)에서 도보로 15분 정도의 거리여서 등교하기에 매우 편리했다. Laura와 Ben이 그들의 이름이었고 그들은 내가 가르쳐준 쉬운 영어이름을 마다하고 굳이 어려운 나의 한글이름을 불러주었다. 나는 첫날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넓은 front garden에는 땅바닥까지 늘어진 수양버들(willow)이 인상적이었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평범한 Irish home에서 한 달을 지내게 된다는 기대감으로 감동하여 "It's like a dream!"이라고 말했는데 Laura는 환하게 웃으며 "Tomorrow morning you'll know it's not a dream."이라고 말하였다. 두 분은 나를 마치 아들처럼 대해주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항상 하루의 일과를 물어보고 저녁 식사 후에는 한국과 아일랜드의 경제나 두 나라의 생활습관, 예절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특히 노인을 공경하는 우리의 예절문화나 부모님과 함께 사는 대가족제도에 깊은 호감을 표했으며 서구 문화의 영향으로 사라져가는 양국의 미풍양속 등을 아쉬워했다. 
나는 무엇보다 그들의 집의 구조와 동네의 조용함을 부러워했다. 한 채의 집을 지은 후 둘로 나누어 완전히 독립적으로 사용하는 "semi-detached house"가 주류를 이루고있는 그 동네는 모든 집들이 front garden과 back garden을 가꾸고 있었는데 특히 back garden은 완벽하게 privacy가 보장되는 훌륭한 공간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넓은 창 밖으로 보이는 back garden의 고운 잔디와 많은 종류의 잘 가꾸어진 예쁜 꽃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동네는 완벽하게 조용했고 9시가 넘어서 불을 끄면 주위는 불빛하나 없는 칠흑의 어둠이었고 차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 완벽한 조용함에 오히려 마음이 불안할 지경이었다. 아침 7시경에 일어나서 동네를 산책하면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8시가 넘어서야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여유로운 삶인가? 
하지만 나는 그들을 게으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는데 왜 우리는 그처럼 바쁘게 무엇에 쫓기듯이 각박하게 살아가야 할까? 어차피 모두가 한번 사는 삶인데... 나는 우리들의 서울을 생각하며 서글퍼졌다. 
Laura는 많은 유학생을 받지 않았다. 3년여에 걸쳐 7-8명의 유학생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들은 국적도 다양했고 성격도 다양했다고 말하면서 유럽의 학생들에 비해 한국과 일본의 학생들이 더욱 훌륭하다고 이야기했다. 그중 한국 학생들에-Laura가 제일 처음 받은 학생은 한국인이었다.- 더욱 호감이 간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나도 물론 기뻤지만 생각해 보건대 한국학생들의 예절바른 모습이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한국의 경제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Ben이 나에게 난데없이 한국에서는 TV를 생산하는가를 물었다. 나는 물론 지체없이 "Of course!"라고 답했지만 실상은 TV생산이란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것임을 알게되었다. 물론 아일랜드에서도 TV를 생산하기는 했고 생산 능력도 있었으나 일본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 도산해 버렸다는 것이다. 영국조차도 그 경쟁을 견디지 못하고 한 두 개의 기업만이 살아남았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가전제품 업체들이 새삼스레 자랑스러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일랜드는 자동차 역시 모두 수입해서 사용하는데 한국의 자동차들은 이곳에서도 매우 비싼 값에 팔리고 있었다. 3년전부터 이곳에서 판매를 시작한 우리 자동차들은 꾸준히 TV광고 등을 통해 이미지를 알리고 있는 듯했고 이미 그들은 대우, 삼성, 현대, 기아 등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대기업에 대한 호감을 크게 갖지 못한 나였지만 우리기업이 먼 아일랜드에서 일본 등의 경쟁국들을 이기고 뿌리를 내리기를 희망했다. 
나는 출발 전에 소화불량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Laura는 나의 위(stomach)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해주었고 아침마다 위를 부드럽게 해준다는 forage를 주었으며 저녁에는 항상 한국쌀로 밥을 해주었다. 그녀의 많은 관심과 배려로 나는 소화에 큰 어려움이 없이 한 달간의 연수를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다. 나는 Laura에게 농담으로 10여 년이 지난 후 우리 아들이 아일랜드에 어학연수를 오면 보살펴 달라고 말했는데 그녀는 매우 기뻐하며 나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떠나는 날 오히려 나에게 줄 선물과 아이들에 대한 선물을 챙겨주는 것을 잊지 않았던 따스한 마음의 두 노부부와의 인연을 계속유지하고 싶다. 서울에 도착한 후 나는 그녀에게 안부전화를 하였는데 전화를 받고 기뻐하는 천진한 그녀의 목소리에서 나는 Irish People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3. UCD에서의 어학연수 
University College Dublin에서의 어학 연수 프로그램은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사실 수업이나 프로그램 등은 한국에서 받은 연수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오래 전에 졸업한 대학의 분위기를 이국에서 느끼며 생활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가? 나는 우리를 이곳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우리정부에 감사했다. 
James Joyce가 공부했다는 UCD는 더블린에서 가장 큰 대학으로 작년부터 모든 수업료를 국가에서 부담하였고 규모는 우리대학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축구장 5개 이상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체육관 앞의 그 넓은 lawn ground와 실내 체육관에서 squash나 실내 축구를 활기차게 즐기는 학생들, 학생회관 앞의 넓은 호수와 벤치들, 이제 막 지어져 아직도 새 건물의 냄새가 나는 Language Center Building, 우리나라 선생님들의 일정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Language Center관계자들의 친절함과 따스함이 잊혀지지 않고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다. 수업은 10명씩 두 반으로 나뉘어 운영되었는데 특히 우리 반을 담당했던 Karen은 세련된 말씨와 manner로 우리를 매료시켰다. 그녀는 secondary school(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 교사였는데 Irish English가 British English보다 어렵다는 통념과는 달리 부드럽고 명확한 발음으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특히 그녀의 Intonation, gesture, 표정 등은 매우 인상적으로 영어를 구사한다면 저렇게 말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매력적인 영어를 구사했다. 
많이 이용하지는 못했지만 "Self Access Area"라는 제도는 영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것처럼 보였다. 그곳은 비디오, 오디오 그리고 컴퓨터 CD-ROM 등의 교재를 자신의 level에 맞는 것으로 선택하여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이었는데 수업 후 보충 학습 장소로서 매우 적절한 곳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교실 수업은 오후 1시면 끝나지만 박물관이나 미술관, 대학 방문, secondary school visit, 더블린 시내관광, Irish dancing강의, 유적지 방문, 시내 쇼핑 등 오후에는 교실에서 배울 수 없는 많은 현장 학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러한 social learning programme을 통해 아일랜드 사람들이나 외국 유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고 더블린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4. DART
주말 여행을 제외하고 내가 자주 갔던 곳은 더블린의 city center와 east coast였는데 우리가 주로 이용했던 교통편은 버스였고 우리는 모두 학교에서 발급해준 한 달간의 bus pass를 사용하여 버스를 자유롭게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버스 기사는 매우 친절하였고 난폭 운전이나 불친절한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더블린에는 지하철이 없으며 출퇴근 시간에는 그들이 불평하는 traffic jam이 있었으나 서울의 traffic jam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교통 혼잡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100만 명이 살고 있다는 더블린은 규모가 매우 작아 며칠만 돌아다니면 금방 지리를 알 수 있었다. 
이들이 이용하는 또 다른 교통수단으로서 DART라는 것이 있었다. 
DART는 Dublin Area Rapid Transit의 약자로 동쪽 해안의 일부를 달리는 기차였다. 나는 특히 DART를 즐겨 이용하였고 시간이 나면 바닷가를 찾았다. 가장 북쪽 역인 Howth와 남쪽의 Bray, Dalkey, Dun Laoghaire등은 인상적인 해안의 작은 마을이었는데 James Joyce 박물관이 위치한 Dun Laoghaire(던리리라고 읽음)는 아름다운 해안 산책로가 있어 더욱 기억에 남는다. 바닷가의 마을들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동해 바닷가에 있는 고기잡이 배들이나 어항(漁港)은 북쪽의 Howth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고 영국으로 가는 Ferry 선착장이거나 요트를 즐길 수 있는 pier들이었고 시민들을 위한 시설과 아름다운 산책로들이 있어서 이곳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내가 가장 사랑한 James Joyce박물관이 있는 Dun Laoghaire는 아름다운 산책로로 나를 행복하게 하였다. 산책로를 따라 둥글게 된 해안선을 따라 걷다보면 손을 잡고 산책 나온 노부부나 조깅을 즐기는 사람들, 아이를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들의 여유롭고 따스한 마음은 이러한 자연 환경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DART는 우리가 건설하게 될 경부고속철도처럼 고속도 아니고 화려한 기차도 아니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존하고 작은 것을 사랑하며 소중히 여기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고 그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어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5.주말여행, 문화 체험기 그리고 Fiona 
금요일 오후 수업이 끝나면 우리는 2박 3일의 주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첫째 주말은 토요일에는 Kilkenny Castle을, 일요일에는 Glendalough을 하루 일정으로 각각 다녀왔다. 사실 2박 3일의 일정을 기대했던 우리로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 여행이었지만 나름대로의 행복을 맛볼 수 있던 여행이었다. 
둘째 주말에는 2박 3일의 기간동안 아일랜드 서쪽 해안에 있는 Galway를 여행하였다. 거의 네시간에 이르는 긴 여정 끝에 우리는 Galway에 도착하였고 우리는 Youth Hostel에 여정을 풀었다. 우리가 가고자 했던 곳은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었는데 하나는 Aran Island와 다음날의 Cliffs of Moher였다. 
하룻밤을 지낸 후 토요일에 우리는 Aran Island로 떠났다. Ferry를 타고 50여분 달리니 멀리 Aran Island가 보였다.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과 선상에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50분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작은 부두에 도착하자 많은 작은 승합차들이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도 각자 5파운드의 돈을 지불하고 Coach에 올라탔다. Aran Island에서 제일먼저 눈에 띄는 것은 수없이 이어져있는 돌담과 거칠게 자라난 들풀과 이름 모를 들꽃들,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인가와 넓은 평원이었다. Aran Island를 보면서 우리의 제주도를 떠올린 것은 비단 나 뿐만은 아니었으리라. 단조로운 지형과 수없이 이어져있는 돌담을 바라보며 나는 우리의 아름다운 제주를 생각했고 아름다운 제주가 이곳보다 더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기를 희망했다. 이곳의 highlight는 무엇보다 섬 끝에 있는 Dun Aonghasa(아마 Inishmor에 있는 Dun Aengus를 가리키는 듯 함: 인용자주)라는 절벽이었다. 2,500년 전에 세워졌다는 요새가 절벽 끝에 있었고 그 밑으로는 200feet높이의 절벽이 있었다. 그 아래로 부서지는 대서양의 파도와 부서지는 흰 포말... 떨리는 다리로 다가가 엎드려서 본 대서양의 바다는 제일 먼저 내게 '자유'를 생각나게 했다. 빠삐용은 이렇게 현기증 나도록 높은 절벽 위에서 푸르른 바다를 바라보며 '자유에의 꿈'을 갈망했으리라. Aran Island는 언뜻 보기에는 그저 평범하고 단조로우며 지루한 섬처럼 보였으나 이 땅 끝 절벽에 서보면 이곳이 얼마나 경이로우며 끝없이 깊고 넓은 곳인가를 깨닫기란 어렵지 않으리라. 바람과 푸르른 초원, 200feet높이의 절벽과 부서지는 흰 파도, 그 아래 바닷물 가까이로 비행하는 갈매기를 보며 나는 다시금 빠삐용을 생각했다. 
"Free as the wind, free as the wind That is the way you should be..." 카라카스의 자유로운 아침을 그리며 목숨을 바쳐 바다로 뛰어든 그의 생애를 회상하며 나는 비로소 이곳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끊임없는 자유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 열망이 우리를 숭고하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세 번째 주말에 나는 정말 꿈에도 그리던 런던으로 가게 되었다. 내가 그토록 런던 행을 열망했던 것은 그곳에서 나는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Musical Miss Saigon과 Les Miserables을 보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일랜드로 떠나기 한달 전쯤 이미 뉴욕으로 전화를 하여 두 개의 뮤지컬을 예약했었다. 토요일 하루에 두 개의 뮤지컬을 보기로 되어 있었는데 오후 3시에 공연이 예정된 Miss Saigon을 보기 위해 West End에 있는 Theatre Royal Drury Lane에 도착하여 팜플렛을 산 후 stalls라 부르는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서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을 기다렸다. Kim이 자신의 미국인 남편인 Chris를 기다리며 부르는 "I still believe"를 부르는 장면에서 나는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 헬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을 그대로 재연하는가 하면 세계적인 가수들의 연기와 노래는 나로 하여금 그것을 바로 앞에 둔 런던사람들을 부러워하게 하였다. 오후 8시에 Palace Theatre에서 공연하기로 되어있는 Les Miserables은 올해로 12년 간 공연되는 세계 최고의 뮤지컬로 나는 이미 그 작품을 4번 본 바 있지만 런던에서 하는 공연이야말로 가장 권위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가장 보고싶은 공연이기도 하였다. 인터넷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했던 Palace Theatre앞에 섰을 때 나는 너무 감동하여 수없이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다. 훌륭한 orchestration과 세계최고의 가수들, 훌륭한 무대장치와 항상 자리를 가득 메우는 수준 높은 관객들.... 이 모든 것들이 런던을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드는데 큰 요소가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런던은 그 이외에도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였으나 그 모든 것을 쓰기에는 지면이 모자랄 것 같다. 단지 최근 한국관이 만들어진 대영 박물관과 Diana의 결혼식장으로 알려진 St. Paul Cathedral의 놀라운 건축 미학은 런던 방문의 백미로 꼽을 만큼 매력적인 것이었다. 
더블린에서는 두편 의 연극과 한편의 뮤지컬을 보았다. 연극은 두 편 다 Oscar Wilde의 작품으로 하나는 'Lady Windermere's Fan'이었고 다른 한편은 'Importance of being honest'였다. 평일이었지만 관객은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고 영어권의 다른 나라에서 온 관객들이 많이 있었다. 'Lady Windermere's Fan'은 코미디였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이 별로 없던 나로서는 정말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의 전개는 희미하게나마 추측해볼 수 있었지만 그들이 표현하는 witty하고도 humorous한 대화는 따라가기 힘들었고 모든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릴 때 같이 웃을 수 없음에 영어권 국가의 국민이 아닌 것을 아쉬워해야 했다. 그들의 연극을 보면서 문화적 공감대를 가진다는 것과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를 가진다는 것에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나도 대학로에서 우리연극을 보며 마음껏 웃어보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두 번째로 보게된 'Importance of being honest'는 미리 학교에서 내용을 조금 공부하고 갔기 때문에 좀 더 수월하게 내용을 이해하고 연극을 즐길 수 있었다. Oscar Wilde의 본고장에서 그의 연극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행운인가? 
런던에서 두 개의 뮤지컬을 본 후에 더블린에서 보았던 'Joseph and Amazing Technicolor Dreamcoat'는 런던의 뮤지컬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공연이었지만 어린이들이 단체로 관람을 와서 즐기는 musical로는 매우 적당하다는 생각이었고 뮤지컬 배우들의 수준도 런던의 수준과 크게 떨어진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어린 학생들이 단체로 관람을 와서 마치 우리나라에서 청소년들이 하이틴 스타들의 공연을 즐기듯이 뮤지컬 극장에서 가수의 노래에 맞춰 따라 부르기도 하고 환호하는 모습은 뮤지컬이 더블린에서 매우 대중적인 공연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이틀전 수요일, 우연히 초대받아 가게된 아일랜드 가정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Fiona였는데 나는 그녀의 집에 가게된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다. 네 아들을 두고 은행 일을 하는 남편을 둔 Fiona는 너무도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고 Irish people의 특유의 친절함과 관대함, 그리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따스함으로 나의 마지막 아일랜드에 대한 인상을 더욱 행복한 추억으로 남게 하였다. 작은 선물에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과 처음 본 사람인데도 마치 몇 년을 사귀어온 사람처럼 느끼게 하는 편안함, 노래를 하면서 바라보는 눈빛의 따스함, 오랜만에 잡아본 기타로 서툴게 부른 'today'와 'My way'를 듣고 나서 꼭 서울에 가서 다시 기타를 잡으라는 간곡한 부탁을 잊지 않는 Fiona의 모습과 착한 아들들의 모습은 사람이 잘 살아가는 것에 무슨 커다란 비밀과 비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녀가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 아름다운 모습임을 마음속 깊이 내게 각인시켜주었다. 
너무도 행복한 아일랜드에서의 4주는 정말 흐르는 물처럼 흘러가고 말았고 내게 재충전의 기회를 주었지만 지나간 시간이 값지고 너무도 소중하였기에 한 달간의 연수로부터 오는 후유증을 이겨나가기도 어려웠다.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발길은 기대와 아쉬움이 뒤섞인 기분이었다. 끝으로 이번 연수의 기회를 제공해준 교육부와 교육청 관계자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나의 공백기간 동안 학교에서 내 일을 대신해준 동료선생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아일랜드를 연수 대상국에서 제외시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는데 그것이 그냥 소문이기를 바라며 이곳은 미국이나 캐나다 혹은 영국에서 느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을 우리에게 주었음을 전하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원주소:  http://tonggu-gm.ed.seoul.kr/jsr/index.htm

 

참고사항: 

기본적으로 그림과 사진을 제외한 저자의 원문과 형식을 그대로 수록하려 노력했습니다.  가능한 몇 가지 오자를 수정하고 영어 철자를 바로 잡았습니다.  영문 지명의 경우 Lonely Planet 사의 Travel Survival Kit 시리즈 중 Ireland 편 1996년 판(2nd edition)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현지 발음은 저자의 원문을 그대로 두었습니다.   천리안을 제외한 각 원문의 위치는 글 마지막에 인터넷 주소를 링크해 부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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