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도대체 이 찰리 맨슨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LAPD와 LA 지방 경찰서는 36년 간에 걸친 이 남자의 온갖 잡다한 생활사를 샅샅히 조사해보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그에겐 점점 더 불리해지고 있음이 확실했다. 찰리 맨슨이란 자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생들 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전혀 계획에 없던 임신에 아버지도 모른채 태어난 그는 1934년 11월 오하이오주의 신시내티에서 살던 16살의 방탕한 소녀 캐슬린 매덕스의 아들이었다. 술로 하루하루를 지내던 캐슬린은 하룻밤의 실수로 찰리 맨슨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이다. 2년 후, 그녀는 자녀 양육비를 이유로 애쉬랜드에 살던 스코트 대령을 고소하였다. 캐슬린은 윌리엄 맨슨이란 자와 잠시 결혼 생활을 한 적이 있었는데, 찰리 맨슨의 이름은 그로부터 따온 것이었다. 누엘 에몬스의 책 '찰리 맨슨, 그가 한 이야기'를 보면, 그가 자기 가족을 이야기한 부분이 있다.

"엄마는 할머니 낸시 매덕스와 할아버지 찰스 매덕스 사이에 난 세 자녀 중 막내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엄마를 잘 키워보려고 했지만, 종교적인 믿음이 광적으로 강한 게 탈이었다. 특히 집안의 어른인 할머니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할머니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 예외란 있을 수 없다고 믿는 분이었으며, 집안의 식구들에게도 그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할아버지는 B&O 철도회사에서 일하셨다.할아버지는 하루종일 일에 매달려 있었고, 회사는 할아버지를 노예처럼 취급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처럼 철두철미한 분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엄마가 귀여워 손으로 조금 토닥거린다거나 어깨에 손을 두르기만해도 할머니는 당장 그만두라고 소릴 질렀다.

엄마에겐, 삶은 끊임없는 거부의 연속이었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밤에 다시 잠자리에 들때까지, "안돼, 캐슬린, 너무 치마가 짧다, 머리땋고 다녀라, 날라리들 처럼 빗고 다니지 마라, 학교 끝나면 바로 집에 들어와야 한다, 남자애한테는 입도 뻥긋하지 마라, 안돼, 학교 파티에 갈 수 없다, 교회에 갈 거니까..." 늘 이런 식이었다. 1933년 15살 되던 해, 엄마는 가출했다.

다른 사람들은 엄마를 그저 나이어린 창녀 쯤으로 치부하던데... 누구에게라도 인정을 받고 싶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사랑에 쉽게 빠지는 경향은 있었지만, 그 나이에 창녀라고? 천만에! 나중에 가서야 삶의 고달픔 때문에 조금은 몸을 팔 수도 있었을 진 몰라도..."

찰리는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으며 따라서 본받을 만한 아버지상이 마뜩찮았다. 캐슬린의 생각으론 아이들은 양육기관에서 키워야 마땅했다. 캐슬린은 한번 집을 나가면 며칠이고 몇 주일이고 소식이 없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찰리는 할머니나 이모와 같이 살아야 했다. 캐슬린이 오빠와 함께 무장강도 혐의로 소년원에 가게 되었을 때, 찰리는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맥머흔에 살던 이모집으로 보내졌다. 이모는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찰리의 어머니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사람이었다.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 캐슬린은 찰리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술과 환락의 생활을 계속하였다. 찰리의 인생에 연속성을 가진 것은 없었다. 항상 새로운 가족을 향해 떠나야 했고, 구질구질한 하숙집을 전전해야 했다. 친구들도 모두 오며가며 알게된 사람들밖에 없었다.

찰리는 식구들이 들려주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하루는 엄마가 저를 무릎에 앉히고 한 술집에 앉아 있었대요. 한 여종업원이 제가 예뻐보였던지 농담으로 엄마한테 저를 자기에게 팔 수 있겠느냐고 물어봤다나요. 엄마는 '맥주 큰 컵으로 하나 갖다주면 그렇게 하죠'라고 말했고, 그 여종업원은 말대로 갖다 줬대요. 엄마는 그 맥주를 혼자 다 마실 때까지 앉아 있다가 날 놓고 가게를 나갔대요. 며칠 후 삼촌이 그 여종업원을 찾아 온 동네를 뒤졌고, 결국 날 다시 데리고 오셨죠."

존 길모어는 '쓰레기 인간들'이란 그의 저서에서 공허와 폭력으로 가득찬 인생을 찰리가 어떻게 수용할 수 있었는지를 설득력있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자신만의 세상으로 파고들었다. 친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린 마음은 주변환경으로부터 오는 외로움에 무관심할 수 있었다. 그는 주의깊게 관찰하고, 경청했으며, 상상력의 무한한 힘에 의지했다. 곧 그는 도둑질을 하기 시작했고, 끊임없이 자신의 곁을 떠나는 그 무언가에 매달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절도라는 행위 속에서 그는 지속성과 영속성을 느낄 수 있었으며, 일은 점점 더 쉬워지게 되었다. 순간적인 모든 것들 속에서, 그가 훔친 물건들은 그에게 안정감이라는 대가를 주었다. 어떤 물건을 소유하게 되면, 그 물건 역시 주인이 의식하든 못하든 일종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법인 것이다.

9살 되던 해, 도둑질하다 결국 덜미를 잡힌 찰리는 소년원으로 보내졌고, 1947년 12살 되던 해에 또 도둑질하다 붙잡혀 인디애나의 테르 호트에 있는 길버트 소년원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일년도 안되어 찰리는 그곳에서 도망쳤고, 그의 비정한 어머니 곁으로 가려했다. 경찰에 붙잡히기 전까지 찰리는 도둑질만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담당판사는 그를 '플래나간 신부의 소년의 집'이란 곳으로 보냈다. 찰리는 그러나 오래 버티지 못했다. 도착한지 며칠 만에 13살의 찰리는 다른 소년 한 명과 함께 무장강도 사건을 저질렀다. 엇비슷한 일이 몇 번 있고 나자, 찰리는 3년 동안 인디애나 소년원에 묶여있게 되었다. 그를 담당한 교사들은 그를 평하길, 누구도 믿지 않으며 "대가가 꼭 있어야지만 착한 일을 하는 아이"라고 말했다.

1951년 찰리와 다른 두 명의 소년은 소년원을 탈출, 캘리포니아로 향했고, 돈은 모두 도둑질과 차량 절도로 마련했다. 또다시 경찰에 붙잡혔을 때, 그들은 거의 유타주까지 도망간 상태였다. 이번에 그는 워싱턴에 있는 국립 소년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찰리는 여러 테스트를 받았는데, 지능지수 109에, 문맹이며 음악만 빼고 다른 과목에의 적성은 평균 수준으로 나타났다. 그를 담당한 교도원은 이렇게 평했다.

"찰리는 거의 터줏대감이었어요. 딱 해야할 일만 하곤 일체 꼼짝하지 않았죠... 대부분 산만하거나 변덕스러웠어요. 그 애는 같은 반 친구들을 즐겁게 해야 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정말 얘는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같은 해, 블럭이란 정신과 의사는 그를 검진하고 나서, "거부와 불안, 정신적 충격의 수치가 상당히 높다"고 적어놓았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채 태어나, 작은 체구와 부모의 사랑 부족으로 인해 찰리는 결국 다른 소년들과의 관계에서 모자란 부분을 채워야 했다. "아마 그런 모습도 소년원을 전전하며 닳고 닳은 한 소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겠죠"라고 말하며, 블럭박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런 무수한 거짓말 뒤편엔 세상으로부터의 사랑에 목말라 있는 극도로 감수성 많은 소년이 자리잡고 있었지요."

잠시동안 일은 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의 이모가 다시 그를 돌보기로 했고, 가석방 될 확률도 꽤 높았다. 가석방 유무를 결정하는 면담이 있기 직전, 찰리는 다른 소년의 목에 면도날을 들이대고 강제로 범하였다. 찰리는 다시 버지니아주의 피터스버그에 있는 연방 소년원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그는 명백한 동성연애 성향에, 위험한 인물로 감시하에서만 안전할 수 있다고 평가됐다.

1952년 9월, 그는 오하이오주의 칠리코스에 있는 좀더 엄격한 교도원으로 보내졌다. 찰리를 담당한 감시원들은 그를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범죄경력을 가지고 있고, 개방적 교도 시설의 환경에는 절대 맞지 않는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분류했다. 어떤 이유에선지, 찰리는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협조도 잘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글을 읽을 수 있고, 간단한 수학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눈에 띄는 발전으로 인해 그는 1954년 5월 19살이란 나이로 가석방었다.

처음 그는 이모집에서 거처하다가, 다음 잠시동안 어머니와 같이 살았다. 1955년 초, 그는 한 여종업원과 결혼하여 '찰스 맨슨 주니어'라는 이릉의 아들도 얻었다. 찰리는 다양한 종류의 허드렛일을 했고, 모자란 생활비는 차량절도로 메우며 살았다. 한번은 그가 훔친 차를 타고 임신한 아내와 함께 로스엔젤레스로 가던 중이었는데, 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다시 경찰에 붙잡혔고, 결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산페드로의 터미널섬에 있는 교도소로 직행하게 되었다. 그의 아내는 그가 감옥에서 3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있는 동안 이혼이라는 현명한 선택을 하였다.

1958년 그는 가석방되었다. 이번엔 그는 포주라는 새로운 직업을 찾았다.그는 파사데나에 사는 못생겼지만 돈많은 아가씨로부터 그의 수입을 충당했다. 1959년 찰리는 두건의 연방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남의 우편함에서 수표를 훔쳐 그것을 37.5달러의 현금으로 바꾸려 했던 것이다. 이번엔 운이 좋아서, 한 젊은 여자가 그의 아이를 가졌다고 법정에서 연극을 한 덕분에 감옥행은 피하게 되었다. 판사는 그 여자의 이야기를 사실인 줄로 믿고 그를 불쌍히 여겼다. 그는 찰리에게 10년형을 내렸고, 바로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몇달 후에, 그는 차량절도와 신용카드 절도로 LAPD에 체포되었지만 증거부족으로 사건은 성립되지 않았다.

1959년이 끝나갈 즈음 찰리는 한 젊은 여자를 꼬셔 700달러를 그의 유령회사에 투자하도록 만들었다.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던 사실은, 그 여자가 찰리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과 그가 마약에 취해 그녀의 룸메이트를 강간했다는 점이었다. 그는 텍사스로 도주했으나 곧 붙잡혀 10년간의 복역생활을 했다. "집행유예라는 단어가 적용될 수 없는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찰리 맨슨"이라고 담당 판사는 말했다. 결국 26살이라는 나이에 찰리는 워싱턴주의 맥닐 섬에 있는 U.S.교도소로 보내졌다.

그곳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의 이목을 자신에게 주목시키고 싶은 욕망이 극도로 강하다. 바람직한 행동으로는 별 주목을 못 끈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지 못한 행동을 함으로써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자신을 '발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불교나 사이언톨로지와 같은 여러 종교의 철학들을 섭렵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지식들이 제대로 그 결실을 맺기도 전에 그는 다른 것에 흥미를 가지곤 한다."

1964년 교도관들은 찰리가 아직도 예전예 비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삶의 불안정성을 수용하는 방식은 예전과 다름이 없다... 자신에게 남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한 일종의 강박관념이 있는 듯 하다... 아직도 정서적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종종 그 어떤 것에 광적인 흥미를 보이곤 한다."

그런 '광적인' 흥미가 어딜 향해 있었던 간에, 비틀즈에 대한 집착이 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확실하다. 찰리가 소유한 기타 또한 그런 집착의 대상 중 하나였다. 그는 기회만 닿는다면 자신이 비틀즈를 뛰어넘는 유명인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감옥에서 그는 퍼블릭 에너미의 옛 멤버이자 마 바커 갱단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알빈 카피스라는 나이 지긋한 갱과 친구가 되었다. 이 사람은 찰리에게 전기 기타를 가르쳐 주었다.

1966년 5월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찰리는 자유시간 대부분을 곡을 쓰는데 보내고 있으며, 작년부터 시작해 그 곡들의 수는 거의 80에서 90곡에 달한다... 그는 기타와 드럼도 치는데, 따라서 나중에 기타리스트나 드러머, 가수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질 수 있을 법하다."

카피스는 찰리의 내면에 있는 인간성에 대해 흥미를 가졌다.

"찰리에게는 확실히 남과 다른 그 무엇이 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인생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알고 있다... 나 또한 그가 하는 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었던 일들을 할 때가 종종있다."

1967년 3월 21일 찰리는 출소하여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진다. 그는 32살이 되었고 인생의 반을 교도소에서 지낸 셈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거부했다.

"아, 싫어요, 바깥 세상으로 나가기 싫다구요... 바깥 세계에 적응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도 하지만, 감옥에서 평생을 보냈어도 마음만은 편했거든요. 난 여기에 갇혀 햇볕을 쬐며 마당을 거닐거나 내 기타를 연주하는 게 좋아요..."

교도관들은 이런 반항을 묵살하고 찰리를 다시 세상으로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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