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정문란의 원인

철종조에 발생한 민란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은 평민이 농(農 )·공(工)·상(商) 등의 주체로써 납세·부역·공납·군역 등 국가의 모든 재정을 책임져야 하는 전면적인 당담자였지만, 이것 이외에도 토호·아전·탐관오리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가며 그들을 수탈하였기에 세계 역사상 가장 가혹한 삶을 살아야 하였다. 삼정의 문란은 백성들의 이런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 삼정의 문란의 대표적 실상을 살펴보게 되면,

田政: 궁방전·둔전 등의 면세지와, 양반·토호들이 조작한 여결·은결의 증가로 농민들의 세금만으로 국가재정을 의지하여야 되었다. 땅 1결당 땅세로 4말, 삼수미 2말2되, 대동미 12말, 결작 2말 이외에 부가세, 수수료 여기에다 황폐한 땅에도 세금을 부과하는 일까지 있었다. 세종조 토지대장에 실려 있는 총 결수를 살펴보게 되면 165만 5234결이었던 것이 1769년에는 141만 1947결로 24만 3287결이 줄어들었고, 여기에 궁방전과 둔전 등의 면세지가 61만 1105결로 늘었다. 차 떼고, 포 떼고 남는 토지 80만 842결로 힘없고 연약한 농민들이 국가의 재정과, 탐관오리·아전·토호들의 호화 사치스런 생활을 책임져야 하였다.

宮房田: 일명 궁장토라 하였으며 후비·왕자대군·왕자군·공주·옹주 등의 궁방에 소요되는 경비와, 죽은 뒤의 제사 비용을 위하여 지급되었다. 궁방전의 설치는 궁방에 따라 다르겠지만 임진왜란 이후 설치되었음이 기록에 보이고 있다. 이 토지는 유토면세와 무토면세의 2가지가 있어 유토면세는 일정한 토지의 관할권과 수조권을 아울러 소유한 것으로 공전에 속했으며, 무토면세는 일정한 땅의 수조권만을 가진 것으로 사전에 속했으나 다 같이 면세되었다,   

屯田① 官屯田: 경작자는 대개 관노비이며 수조권은 국가의 지방관청이 가졌다. 관둔전은 관청의 경비가 공해전, 공수전 등으로는 부족하였기 때문에, 이 부족분을 보충하는 조치로써 설치하여 조세를 면제하여 주었으므로 자경무세의 토지라 한다. 유수와 목과 대도호부에는 10결·도호부와 지관은 8결·현령과 현감은 6결이었으나 경비의 수요가 늘어나자 미간지를 개간시켜 둔전을 삼도록 허용하고, 각 진장의 경비까지 부담케 하였는데 지방관리들은 평민들까지 동원하여 개간을 시켰다.

  ② 軍屯田: 군수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둔토를 설정하여 군졸을 시켜 경작과 수확을 하던 둔전으로, 육군의 각 병영에 설치한 병영둔과, 해군의 각 수영에 설치한 수영둔, 각 진에 설치한 진둔 이외에도 많은 영에 군둔전을 두었다.   

餘結: 토지 대장에 실려 있지 않은 토지의 결수로, 토지 감정을 할 때 실 면적 보다 줄여서 신고하는 것으로 실 결수 5결을 4결로 감정하여 나머지 1결을 착복하는 식으로 관리들의 사복을 채우기 위한 농간으로 그 폐단이 상당히 심하였다,

隱結: 조세의 부과 대상에서 부정으로 누락시킨 토지로써, 면세지로 가장하여 조세의 대상에서 뺀 것으로 주로 궁방전에 투탁하는 일이 많았다. 토지의 소유자가 은결하는 것과, 경작자가 은결하는 외에 관리들이 부정으로 은결시켜 착복하는 경우도 많았다. 은결의 확장은 일반 농민에게 큰 부담을 지게 했으며 국가재정의 축소를 초래하였다.

三手米: 임진왜란 때 군사력의 부족을 느낀 정부는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장정을 모집하여 사수·포수·살수의 삼수를 분과 훈련시켰다. 이 삼수군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둔전을 두었으나 이것으로 부족하게 되자 1602년에 함경·평안도를 제외한 6도에서 1결당 1말의 특별세를 부과하였다. 그러다 다시 세액을 올려 1말2되로 증액시켰는데 이를 삼수미라 하여 1894년 갑오경장까지 계속되었다.   

大同米: 1608년부터 공물을 미곡으로 통일하여 바치게 했던 납세제도로 경기도부터 실시하였다. 춘추2기로 나누어서 땅 1결당 8말씩 도합 16말을 징수하여 10말은 중앙의 수요에 충당하고 6말은 경기청에 두어 경기청의 수요에 충당하였다. 1677년 전국적으로 확대실시 하였고, 1708년에는 다시 상정법으로 개칭하여 미곡 12말을 징수하는 외에 별수미라 하여 3말을 더 받았다.

附加稅: 세곡의 소모 및, 중간 잡비를 예상하여 부과하던 것으로, 세곡의 결실을 보충한다 하여 규정이외로 받던 매섬 당 3되의 加升米, 경주인의 보수로 매섬 당 6되의 창역가미, 세미 60섬 이상 받던 군에서 5섬을 납세의 수수료로 받던 호조작미, 창고에 바치는 수수료로 창작지, 공주인의 보수로 매섬 당 1되의 공역가미, 세곡을 선박에서 입고하는 잡비로 매섬 당 3되의 이가, 상납하는 세공의 수운비로 매섬 당 3되를 부과하는 선가, 담당 관리들을 위로하는 비용으로 매섬 당 2되를 부과하던 인정미, 이외에 왕실의 축하를 위해 예물대로 내는 진상가미, 수령들의 잡비로 바치던 雉鷄柴炭價米, 雉鷄色洛米와 영주인의 보수로 영주인 役價米, 倉番과 庫直의 看色米, 세곡의 형평을 맡은 자의 보수로 타석미 등이 있었다.

結作: 1750년부터 세수의 부족으로 인해 매 결당 2말씩을 田結의 부가세로 징수하였다.

田稅: 토지세로 결당 4말을 징수하였다.

白地徵稅: 조선중기 이후 관리의 착취로 빚어진 위법 징세의 일종으로 실제로는 토지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가전적을 만들어 강제로 징수하던 제도.

雉鷄柴炭價米: 각 고을에서 필요한 노역은 백성들에게 부역으로 시키고 경비는 시탄(땔나무와 숯)·치(꿩)·계(닭)·마초(馬草) 등 현물로 받아들였다. 이러하던 것을 대동법 시행 이후 (1608)에는 전결에 따라 쌀을 부과 징수하였으나 그 명목이 여러 가지로 복잡하여 토호, 아전들의 토색질로 이용되었다. 1751년 이후에는 1결에 3-4말을 징수하였다. 그런데 대개의 고을이 그 소속 전지의 총 결수를 셈하여 그것을 정액으로 만들어 놓고는 농사의 풍년과 흉년에 관계없이 징수하였다.

 

軍政: 평민만이 부담하는 양역(병역)으로 16-60살까지가 여기에 해당하였고, 이들을 장정이라 하였으며 이들 장정이 지는 양역에는 신역과 보가 있었다. 신역은 장정이 교대로 군역을 지는 것으로 이를 번상군이라 하였고, 번상을 마치고 귀향한 사람들은 하번군이라 하여 한 달에 한번씩 군사훈련을 받았다. 한편 한번도 번상하지 않는 양인(평민)은 신역을 지는 대신 보(保)가되어 번상하는 장정들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군포를 바쳤다. 군역을 치르는 대신 대역세로 포 2필씩을 징수하였는데, 이 의무를 져야 하는 평민의 수가 숙종 때 30만 명, 영조 때 50만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중에는 관리와 결탁하여 군포를 바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결국은 돈 없고 의지할 곳 없는 가난한 평민들만 부담을 지게 되었다. 여기에다 황구첨정·백골징포·족징·인징 등의 폐단으로 인해 평민들의 고통은 이루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시달리다 지친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기 시작하여 농촌은 날로 황폐해져 가니, 조종에서는 군정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지만 관료들은 협잡으로 한목 보던 대상을 빼앗기는 동시에 그들 자신도 국역을 져야 하는 부담 등으로 인해, 자기 목에 방울을 달려는 정신 나간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 질 수 없었던 것이다.

1750년 균역법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하였으나 평민들만이 져야 하는 군역이기에 평민들의 고통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군포를 반으로 줄여 1포로 정하고 어염세·선박세·은결 등에 과세하여 돈을 받는 등 부족액을 보충하기로 하였지만 양반·아전·관노 등은 병역이 면제되어 있는데다가, 정치기강이 썩을대로 썩어 있어 온갖 협잡이 성행하여 평민들만 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하였다.

황구첨정(黃口簽丁): 어린애를 장정이라 하여 군포를 부과하였다.

※목민심서에 나오는 다산의 목격담을 살펴보면, 다산의 유배지 인근 노전이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일로써, 어떤 사람이 아들을 낳았는데 난지 사흘 되던 날 벌써 병적에 올려지고는 군포를 내지 못한다고 里正이 그 집 소를 끌고 갔다. 이 광경을 본 그 집 남자는 칼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서 "이것이 죄다"라며 자신의 음경을 끊어 버리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아내는 통곡을 하면서 끊어진 음경을 싸가지고 현아로 찾아가서 하소연하게 되었는데 그 음경에서는 그때까지 붉은 피가 흘러내렸으며 관청의 문지기는 그 여자가 문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진땀을 빼고 있었다.

백골징포(白骨徵布): 아전들이 죽은 사람을 군적에서 빼지 않고 살아 있는 것으로 하여 군포를 받아 갔다.

역근전(驛根田): 온갖 수탈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간 사람들의 세금을 부과하기 위하여 마을에서 공동으로 경작하던 토지.

군역의 해당자가 도피한 뒤 10년이 되도록 행방불명인 경우에는 면역조치를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이것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아 도피자의 부담을 마을 사람들에게 공동으로 부담시켜 과세하던 것을 동징(洞徵)이라 하였고, 인접한 주민들에게 과세하던 것을 인징(隣徵)이라 했으며, 친척들에게 부담시켜 과세하던 것을 족징(族徵)이라 하였다.

이렇게 마을주민·옆집사람·친척들에게까지 연대 부담을 시켜 가뜩이나 과중한 세금에 허덕이던 평민들의 곤란은 점점 더 막중하여져 결국에는 도망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도망간 사람이 생기면 그가 경작하던 땅을 몰수하여 이를 마을에서 공동 경작하여 그 소출로 세금을 내게 하였고 이것을 역근전이라 하였다.  

강년채(降年債): 60세 이상이 되어 양역이 끝난 사람들에게 나이를 줄여 군포를 징수하였다.

마감채(磨勘債): 아버지가 70세 이상이면 아들 한 명을 군역에서 면제시켰고, 90세 이상이면 아들 전부를 면제해 주었으며, 아들이 없으면 손자 또는 외손자까지 면제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정치의 문란으로 이것을 무시하고는 장차 아버지의 나이가 70세 이상이 되어 아들이 면제받을 시기의 군포를 앞당겨 받았다.

 

환곡(還穀): 관리와 토호들이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기름 짜듯이 짜낸 대표적인 수법으로써 전정(田政)이나 군정(軍政)의 악정보다 더욱 악랄한 수법을 동원하여가며 백성들을 갈취하였다. 흉년 또는 춘궁기에 곡식을 빈민들에게 대여하여 풍년이나 추수기에 이를 반납하는 진휼제도로 1451년에 10말에 2되의 이식으로 정하여졌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으로 인해 국력이 극도로 소모되었고, 여기에다 세제의 문란으로 국고의 수입이 감소하여 군비확장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함에 따라, 환곡의 이자를 국비에 충당하고자 관직을 팔고, 곡식을 옮기는 방법 등으로 곡식을 확보하였다. 각 관청, 군영이 자기가 보유한 곡식을 대여하여 그 이자로 경비를 조달하게 하니 환곡은 이미 대여·구제의 방편이 아닌 과세·이식을 위한 수단으로 변하였다. 따라서 백성들의 필요여하를 불문하고 강제로 대부하였으며 이식도 점점 높게 되어 갔다. 이를 기화로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심하여져 백성들의 원망이 쌓여 갔다.  

와환(臥還): 정부에서 백성들에게 빌려준 환곡을 받지 않고 그대로 무시해 버리는 것.

빈민 구제가 목적이었던 것이 관리들의 부정으로 빌려줄 때는 양을 줄여서 대여하고, 받아들일 때는 엄청난 이자와 수수료까지 붙여서 받아들였기에 빈민들은 그 빚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이런 빚을 탕감해 주는 와환을 정강의 하나로 내세울 정도로 환곡의 폐해가 극에 달하였다.

별작전(別作錢): 지방수령들이 저지른 축재의 한가지 방법으로, 상부의 명령으로 군·현이 보유하고 있던 양곡을 백성들에게 돈을 받고 팔 때, 지방수령들은 지시 받은 양보다 더 많이 방출하고는 상부에서 지시 받은 본래의 양과 본전만 남겨 두고 나머지를 횡령, 착복하였다. 특히 이들은 상부지정 가격보다 비싼 일반 시중가격으로 팔아 더 많은 부정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분석(分石): 벼슬아치들이 국고미를 착복하고는 그 부족 되는 부분을 채우기 위하여 겨나 모래를 섞어 놓았다. 임오군란의 직접적인 발발 원인은 이런 分石때문에 일어났다.

사혼(私混): 지방 아전들이 환곡을 거두어들일 때, 보수나 사례비 명목으로 곡식을 강압적으로 더 받아 내어 환곡과 같이 증수한 뒤에 따로 자기 몫을 착복하던 방법.

허류(虛留): 전임관리와 아전들이 서로 결탁하여 창고에 있는 양곡을 횡령, 착복하고 장부나 문서상으로는 실제로 있는 것처럼 허위로 기록하여 후임관리에게 인계하는 방법.

입본(立本): 풍년과 흉년에 봄과 가을의 미곡시세를 예측하여 대전으로 사취하였다. 빈민구제라는 환곡의 정신을 잃고 고리대금 성격으로 변하여 백성들에게 꾸어 준 곡식을 여러 배의 이자로 환전하여 취득하였다.

증고(增 ): 군, 현에서 보유한 양곡을 방출할 때 아전들이 지정 가격을 기만하던 방법으로, 방출할 양곡은 정부에서 가격이 정하여져 있어 이에 따라 분배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군, 현의 수령과 아전들이 서로 결탁하여 자기 지방의 시세에 따라 지정된 가격보다 비싸게 팔아 시세차익을 착복하였다.

탄정(呑停): 흉년이 들면 지방별로 그 정도에 따라 환곡의 수량을 감해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아전이나 서리들은 정부에서 지시가 내려오기 전에 환곡을 독촉하여 징수하여 놓고 정부에서 감해 주는 양만큼 착복하였다.

 

  

 
 

화조도
花鳥圖

逸齋 申漢枰(1726∼?) / 朝鮮 1788年
종이·彩色 124.0×54.2

호암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