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미친 사대주의

1894년 농민과 동학교도들이 일으킨 민중혁명.

조선후기에 와서 정치의 부패, 탐관오리의 행패, 세금의 과중 등으로 농민들은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고, 특히 외국세력의 침입으로 국가의 위험이 가중되는 한편, 농촌의 신분계급의 변동에 따라 농민의 사회의식이 급속도로 발전되는 등 복잡한 정세를 이루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농민들은 막연하게나마 외국의 침략을 물리치고, 정부에 개혁을 요구하는 풍조가 싹트고 있었다.

그 중에서 동학은 서학(천주교)에 대립하여 민족 고유의 신앙을 바탕으로 한 자생 종교로, 혼란한 사회실정을 배경으로 급속도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신앙의 영역을 넘어 농민들의 사상을 뒷받침하고 사회개혁 및, 외국세력의 배척을 포함하는 종교적인 세력으로 삼남지방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광범한 계층의 민중들을 결집하는데 성공한 동학은, 1863년에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당한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억울하게 뒤집어 쓴 죄를 씻음)을 전개하였다.

1892년 12월 제2대 교주 최시형의 통문에 의해 전라도 삼례도회소에 모인 수천 명의 교인들은 진정서를 가지고 동학, 서학에 대한 혼돈과 동학에 대한 탄압을 반박하였다. 전라감사는 폭동을 두려워하여 동학교도의 탄압을 금하는 관문(상급관청에서 하급관청으로 보내는 문서)을 발표하자, 이에 기세를 올린 교도들은 다시 전국에 통문을 돌려 교주의 지휘아래 교조의 신원을 진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1893년 1월에 진정서를 정부에 보내고 다시 3월에는 박광세 등 4십 여명이 서울에 올라가 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이때의 상소문 가운데는 외국인 배척의 내용이 들어 있었으며 서울 각처의 외국인 주택, 교회, 영사관 등에는 외국인의 철수를 요구하는 전단이 붙어 있어 외국인과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호조참판 어윤중을 양호선무사로 보내어 무마케 하는 동시에 장위영 영병간 홍계훈에게는 군대를 주어 청주에 진주케 하고는, 뒤로는 비밀리에 원세개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한편 동학교도들은 신원운동의 실패에 불만을 품고 4월 26일 전국의 교도를 충청도 보은에 소집하여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5자로 된 깃발을 날리면서 2만 여명의 군중들이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어윤중의 무마로 일단은 해산하여 한때 사태가 수습되는 기미를 보였으나 오히려 이는 정부의 무능을 표시하는 결과를 가져와 이듬해에 본격적인 민중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전라도는 원래 곡창지대로 많은 곡식을 수확 할 수 있었기에 관리들의 토색질이 가장 심하였던 곳이었으며, 그런 원인으로 조선말 고종 때에는 대규모의 민란이 26차례나 발생하였고, 특히 고부에서의 민란은 동학혁명이 일어나는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의 고부군수 조병갑이 군내의 만석보를 수축시킬 때 동원시킨 군민들에게 임금도 주지 않았으며, 거기에다 터무니없이 수세를 징수하여 총 7백여 섬을 횡령하여 착복하였고 또, 군민들에게 황무지를 개간시키게 하고는 강제로 세미를 징수하여 사복을 채웠다.

이밖에도 태인 군수를 지낸 자기 아버지의 비각을 세우기 위하여서 군민으로부터 금전을 착취하였고, 잘사는 군민들에게 불효·불목 등의 억울한 죄명을 뒤집어씌우는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가며 불법으로 백성들을 수탈하여 착복하는 탐학을 자행하였다.

이에 격분한 농민들은 동학의 고부접주 전봉준을 선두로 군수의 불법에 항의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드디어 전주로 올라가 전라감사 김문현에게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였으나 감사는 이를 수리하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그 대표자를 잡아 가두었다.

이리하여 1천여 명의 농민들은 전봉준을 선두로 하여 1894년 2월 15일 관아를 습격하여 세미를 빈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의 저수지를 파괴하고는 해산하였다.

이때 장흥부사로 있던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고부민란의 책임이 동학교도에 있다 하여 교도들을 체포하고, 주택에 방화하고, 처자식을 살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러 오히려 동학교도들의 재 폭동을 유발시켰다.

다시 격분한 농민들은 4월 하순 '보국민안'(保國民安)을 외치며 백산으로 진격하자, 부근의 농민 수천 명의 호응을 얻으며 점점 농군들의 수가 늘어나게 되었고 군중들을 정렬하여 전봉준을 총대장으로·김개남·손화중을 장령으로 삼고, 농민군의 체제와 규율을 엄격히 하는 동시에,

  1 불살생(不殺生).

  2 충효총전 제세안민 (忠孝叢全 濟世安民).

  3 축멸양왜 징청성도(逐滅洋倭 澄淸聖道).     

  4 구병입경 멸진권탐(驅兵入京 滅盡權貪).

의 4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이때의 봉기는 동학과 직접적인 관계는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농민군의 조직은 동학교도의 조직망을 이용하였고 그 지도층에는 동학교도들이 많았었다.

농민군들은 5월 11일 전주에서 온 1천여 명의 관군과 보부상군을 격파하고, 무장과 영광으로 진격하여 군기를 빼앗고, 죄인을 석방하는 한편 탐관오리를 추방하였다.

당황한 정부는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고 1천여 명의 군사들을 군산에 상륙하게 하고 다시 5백 명을 증원시켜 법성포에 상륙시켰으나 혁명군에게 패하였고, 혁명군은 5월 31일 전주를 점령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고 있을 때인 6월 8일에 청나라 군사가 아산만에 도착하였고, 뒷 따라 일본정부는 천진조약에 의한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5월 7일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정부는 험악한 사태가 벌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속히 동학군을 회유하여서라도 해산시킬 필요를 느꼈고, 휴전을 교섭하여 전주에서 강화를 맺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 동학교도와 정부는 서민정책에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를 숙청할 것.

  3 횡포한 부호를 처벌할 것.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을 처벌할 것.

  5 노비문서를 소각할 것.

  6 7종의 천인에 대한 처우를 개선할 것.

  7 과부의 재가를 허용할 것.

  8 무명 잡세를 폐지할 것.

  9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일본과 간통하는 자들을 엄벌할 것.

 11 공적인 빚과 사적인 빚을 면제해 줄 것.

 12 토지의 평균 분작을 할 것.

등의12개 조항이었다.

강화후 대부분의 농민들은 철수하였으나 동학교도들은 교세 확장을 위하여 그들의 조직을 각지에 침투시켰고, 전라도 53군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단이 많은 나쁜 정치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이 휴전은 순간을 넘기려는 정부의 사탕발림으로 처음부터 지켜지지 않을 약속이었기에 동학군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고, 정부는 강화 조건을 이행하지 않는 한편 청군은 물론, 일본군도 6월 9일부터 1만 명의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켜 왕궁을 점령하고, 7월 26일 드디어 청일 전쟁을 일으키는 등 험악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10월 12일 동학교도들이 삼례회의를 연 결과 전봉준·김계남 등의 과격파는 최시영·이용구 등의 온건파들의 타협론을 거부하고 북상하니, 전국적으로 의거가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전봉준의 10만 호남군과 손병희의 10만 호서군은 세 길로 나뉘어서 논산을 거쳐 공주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과 대결하여 결전, 분투하였으나 근대식 훈련과 좋은 장비를 갖춘 일본군에게 패배하여 퇴각하였다.

전봉준은 재기를 꾀하였으나 배반자의 밀고로 11월 순창에서 체포되어 다음해 3월 서울에서 처형되므로 써 1년에 걸친 동학혁명은 30-40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끝 마쳤다.

동학혁명은 이와 같이 양반사회의 부패와, 지방관리와 관료들의 말도 안 되는 학정에다, 청나라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일어난 역사상 최초의 민중운동으로 지도층과, 무기의 열세 등 많은 부분에서 불리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역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대내적으로는 위정자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시켜, 갑오경장의 정치적 혁신을 가져왔고, 대외적으로는 청일양군이 출병하여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갑오경장이 굴욕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나라 백성들의 자각에 의해 발발하였던 민족적인 자유혁명을, 남의 나라에까지 쳐들어와서는 자기들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백성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조선을 장악한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개혁이었기에 이 개혁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고 갑오경장은 나라가 망하였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결과 밖에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하경산수도
夏景山水圖

北山 金秀哲(19世紀) 朝鮮 19世紀
종이·水墨淡彩 114.0×46.5

호암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