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조 민란   민란의 원인

조상을 탓하고 남을 탓한다고 하여 모든 일이 해결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보다 남의 탓을 먼저하며 자포자기하는 민족성은,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고칠 생각조차 하지 않아 역사에 기록된 그 많은 침략과 노략질을 반복해 가며 당하게 만들었고, 주권을 빼앗기고 속국으로 전락하는 치욕의 역사를 만든 것도 부족하여 이제는 남을 돕는답시고 주둔한 자들의 만행까지 겪어야 하는 모욕의 역사를 써 나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고 못하고 있는 우리들은 스스로의 각성을 통한 변화를 거부하며, 과거의 잘못을 그대로 따라 하면서 또다시 치욕의 역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우리의 민족성은 언제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부터 그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19세기에는 전 세계가 격변하였던 시기로 경제·정치·인권 등이 봉건사회의 암울함을 깨고 눈부신 발전을 계속 하였다. 그러나 그 중요한 시기에 우리는 일본의 끈질긴 방해와, 우리 스스로의 폐쇄적 정책으로 인해 세계에서 고립되어 가며 자멸하고 있었다.

그 중요한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하였으며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를 분석하여 왜 강대국의 제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제부터 얽힌 실타래를 풀 듯이 조심스럽게 역사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그 중에서 1862년 철종조에 발생한 민중의 봉기를 살피고자 하는 이유는, 우리의 문제점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시점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고, 그 이유로는 원인에 대한 결과이면서 또다시 원인이 시작되는 전환점으로써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의 전후를 살펴보므로 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체를 좀더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철종조 민란: 조선 철종 때 전라·경상·충청의 삼남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봉기.

농업을 위주로 한 자연 경제를 재정적 기초로 삼은 정부는 국고의 수입을 전적으로 농민에게 의존하였다. 여기에 재정적 수요가 점점 늘어나면서 농민의 부담이 더욱 무거워졌고 특히, 조선중기 이후에는 심해진 삼정의 문란과, 지배층의 가혹한 착취와, 세도정치에 의한 정치적 모순과, 문호개방 이후 급속히 증가된 지출비 등으로 농민들에게 2중·3중의 부담을 겹치게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조세를 징수하러 온 아전들의 행패가 극악무도할 정도로 막심하였다. 이런 결과에 의해 초가 4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1년 세금이 100여 금에 달하였고, 토지 5-6 두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1년에 4섬의 조세를 바쳐야 하는 실정이었다. 이런 현실로 인해 농민들 사이에는 관리계급에 대한 불평이 늘어났고 급기야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같은 사정은 조정에서도 논의되어 1861년에는 왕이 친히 지방관리의 행패를 엄중히 처단하도록 명하였으나 당시의 영의정이었던 정원용의 반대로 이것이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이듬해인 1862년 2월 중순부터 영남의 진주를 필두로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직접적인 동기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백낙신의 착취와 박해에 있었는데, 그는 횡령·취잉·공갈·늑징 등의 방법으로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6만여 냥을 호별로 할당하여 강제 징수를 감행하자 이에 백성들이 민원을 일으키니 전 교리 이명윤·(직접적인 연관은 없는 듯, 계속적으로 무죄를 주장하였음) 유계춘·박숙연 등과 같은 양반 지식인들이 주모자로 나서서 향리의 간부들을 가담시키고, 머슴살이의 초군 목동까지 규합하여 어느 정도의 조직과 훈련을 갖게 한 다음 그들을 전위부대로 내세워 진주 외각으로부터 읍내로 진격하였다. 이들은 배신하는 이탈자에 대한 징계 규정까지 만들어 단결을 굳게 하는 등의 치밀한 행동을 감행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보고를 받고 2월 29일 박규수를 안핵사로 삼아 사태를 수습케 하였으나, 그동안 눌리어 왔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진 농민들의 분노에 찬 항쟁은 진주에서 그치지 않고 삼남지방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3월에는 전라도 익산·4월에는 경상도 개령·전라도 함평·5월에는 충청도 회덕, 공주, 은진, 연산, 청주·전라도의 여산, 부안, 금구, 장흥, 순천·경상도의 단성, 함양, 성주, 선산, 상주, 거창, 울산, 군위, 안동 등지에서 계속적으로 폭동이 일어나 조정에서는 박규수를 필두로 삼남 각지에 안핵사, 선무사,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케 하였다.

민란의 주모자는 극형에 처하고, 탐관오리를 징계하고, 한편으로는 삼정의 근본적인 시정책을 강구하는 등의 태도를 취하였다. 이에 박규수는 현지에 내려가 민란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그 원인을 밝히면서, 민란은 그 원인이 국가재정의 소모와 민생의 궁핍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삼남지방에는 100호 미만에 10만 9천8백여 섬의 환곡을 징수하였으므로 매호당 1천9백여 섬의 부담이 되는 등 농민들의 어려운 생활상을 말하고, 그 시정책으로 환곡제도의 폐지를 상소하였다. 조정에서는 5월 22일 이를 접수하여 26일에 삼정의 개혁을 위한 이정청을 설치하여 <삼정이정절목>을 공포하였다.

그 내용은 田政과 軍政에 대해서는 민원을 참작하여 그 폐해를 시정하는데 힘을 쏟고, 還政에 대해서는 23개의 수습방안을 열거하였다. 그 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① 전국의 환곡수량을 2백36만 1천9백98섬으로 고정하고 1백50만 섬은 보유미로 항상 놓아 둘 것.

② 허류 환곡 2백81만 6천9백16섬 중 3분의 2는 탕감하고, 3분의 1은 관리나 아전들이 포탈한 것이 명백하므로 그들에게 본전만을 10년 연부로 상납하게 하되 1천 섬 이상을 포탈한 자는 명부를 만들어 철저히 조사하여 처벌한다.

③ 전국 전결(田結)의 실제 경작 수를 밝혀 매 결당 2결씩을 결전의 예에 따라 납부케 한다.

는 등의 응급조치를 취하였다.

이같이 하여 치열하였던 각 지방의 민란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으나, 그 해 여름의 한발과 수해로 다시 민심이 동요하여 8월 이후에는 다시 전국적으로 민란이 확대되었다. 9월에는 제주도에서 수만 명의 농민이 폭동을 일으켰고, 10월에는 함경도 함흥·11월에는 경기도 광주·12월에는 경상도 창원, 남해·황해도 황주 등지에서 민란이 폭발하여 그 해가 저물도록 전국의 불안은 계속되었다. 이듬해에는 서울 한복판에서 금위영의 군졸까지 소요를 일으켜 좀처럼 안정될 기세를 보이지 않았으나, 결국 무능한 철종이 죽고 그와 함께 외척 안동 김씨의 세도도 몰락하여 국가 전반에 커다란 변동을 초래하여 농민의 항쟁도 다시 소강 상태가 되었다.

 

   

 

오수도
午睡圖

小塘 李在寬
(1783∼1838以後) 朝鮮 19世紀 初
종이·水墨淡彩 122.0×56.0

호암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