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 백서사건

1801년 신유사옥 때 천주교도 황사영이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국내의 천주교 박해에 대한 혹독한 전말 보고와 그 대책을 흰 비단에 기입하여 보고하려던 밀서 사건.

황사영(1775-1801)은 경상도 창녕사람으로 정약현(다산의 큰형)의 사위였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게 알렉산드르라는 교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으며 1791년에 나이 17세의 어린 몸으로 진사에 합격하여 시험관을 놀라게 하였고, 왕으로부터 칭찬과 학비까지 받았다.

1798-99년경에는 서울에 머물면서 나이 많은 여러 교도들에게 교리서를 가르쳐주고 교리서를 등사하는 등의 의욕적인 활동을 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들어오자 그를 도와 포교에 힘썼으며, 중국에까지 그의 심부름을 다녀왔다.

신유사옥이 일어나자 충청도 제천군 봉양면 배론이라는 곳의, 토기를 만드는 천주교도 마을에 가서 토굴 속에 숨었다. 황 심이라는 열렬한 신자와 황사영이 연락이 닿아 위기에 놓인 조선 교회를 구출할 방책을 상의하였다. 그들은 조선 교회의 박해받는 실정을 자세히 기록하여 교회의 재건 책을 호소하는 길이 62cm 넓이 38cm 되는 흰 명주비단에다 한 줄에 110자씩 121행, 도합 1만 3천여 자를 검은 먹으로 깨알같이 쓴 긴 편지를 황 심과 옥천희로 하여금 10월에 떠나는 동지사 일행에 끼어서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백서 속에는 발송인 황 심의 이름만이 쓰여져 있으며, 지은 날짜는 "천주 강생 후 1801년 서만(西滿) 달두(達 ) 첨례 후 1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밀서를 지은 황사영은 9월 29일에 잡혀 서울로 끌려 올라와 11월 5일에 처형되었으며 가산은 몰수당하고, 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아들은 추자도로 각각 귀양갔다. 먼저 잡힌 황 심과 옥천희도 그보다 며칠 전에 각각 처형을 당하였다.

백서는 관헌들의 손에 넘어가 조정을 아연케 하였고, 그로 인해 천주교의 탄압이 더욱 가혹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황사영 백서사건이라 한다. 그 후, 조정에서는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 사건의 전말에 대한 변명책으로 이 백서의 원 기록에서 주문모 등에 관한 불리한 기사는 되도록 빼고 고쳐서 겨우 1행에 15자 15행의 도합 860여자로 만들어 명주비단에 써서 동지사 겸 진주사에게 북경에 가서 보고하게 하여 양해를 구하였다.

오늘날 전하는 백서는 원본과 사본의 2종이 있으며, 이것이 신유박해 후 근 백년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 뒤에 발견되어 당시 조선 교회의 주교이던 뮈텔의 손에 넘어 갔다가,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조선 순교 복자 79명의 시복식이 거행될 때 교황에게 전달되어 지금은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영인본이 있으며 불어로 번역된 것도 있다.

원문의 내용은 대략 3개의 대목으로 나눌 수 있다.

1 당대의 교세와,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신유사옥 때의 순교자 약전.

2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수형.

3 정계의 실정과 이후 포교하는데 필요한 4가지 건의 책.

 ① 서양제국의 동정을 얻어 성교를 받들어 나가고, 백성들에게 필요한 자본을 요구.

 ② 청 황제의 동의를 얻어 서양인 신부를 보낼 것.

 ③ 조선을 청에 부속시키고 친 왕에게 명하여 조선국을 감독케 할 것.

 ④ 전쟁을 모르는 조선에 배 수백 척과, 강한 병사 5-6만으로 서양전교대를 조직하여 조선에 들어와서 선교사의 포교를 쉽게 할 것.

이와 같이 당시의 상식으로는(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용인될 수 없는 극단의 문구까지 사용하였으며, 뮈텔 주교도 불역본 서문에서 "음모의 대부분이 공상적이고 위험천만한 것" 이라는 동시에 "조선정부가 필자에게 엄벌을 가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라고 논하였을 정도였다.

 

 

청자투각칠보문향로

경기도 개성부근에서 출토

국보 95호

전체높이 : 15.3 cm / 지름 : 11.5 cm

국립중앙박물관